도솔산지구 전투
도솔산지구 전투(兜率山地區 戰鬪) 또는 도솔산 전투(兜率山 戰鬪)는 강원도 양구군 동면에 위치한 도솔산 일대에서 조선인민군 제12사단과 대한민국 해병대 제1연대가 맞붙은 전투이다. 원래 미국 해병대 담당 구역이었던 도솔산 일대에서 미군이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자, 대한민국 해병대 제1연대가 임무를 인수하였다. 약 2주 간의 전투 끝에 대한민국 해병대가 도솔산과 인근 23개의 고지를 모두 점령하면서 대한민국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전투 승리 이후인 1951년 8월 19일 이승만 대통령은 전투에 참여한 해병대 제1연대에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대한민국 해병대에서는 도솔산지구 전투를 '해병대 7대 작전' 중 하나로 분류하고 있으며, 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해 '도솔산의 노래'(도솔산가, 兜率山歌)를 만들고, 도솔산 정상에 도솔산 전적기념비를 건립했다. 전투가 벌어졌던 강원도 양구군에서는 1998년부터 도솔산지구전투 전승행사를 개최하고 있으며, 1999년 6월 도솔산지구 전투위령비를 세웠다. 국가보훈부에서도 도솔산지구 전투에 참전한 김문성과 박중식을 호국의 인물로 선정하였다.
배경
[편집]춘계공세 이후 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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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민지원군이 춘계 공세에서 공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38선 이북으로 철수한 이후,[1] 현리 전투로 상당한 병력을 잃은 공산군에 맞서 매슈 리지웨이는 미국 제8군 지휘관이었던 제임스 밴 플리트에게 공산군에 반격을 가할 것을 제안했다. 1951년 5월 10일부터 유엔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2] 1951년 5월 22일 현리 전투로 대한민국 제3군단이 패전하면서 군단이 완전히 붕괴하고 중국인민지원군이 대관령까지 진출했으나 미국 제8군의 예비군인 제10사단이 투입되어 전세를 만회했다.[3] 한편 1951년 5월 용문산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제6보병사단은 중국인민지원군 제63군을 추격해 파로호 전투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을 섬멸하고 5월 30일 화천호 일대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4]
유엔사령부는 도주하는 중국인민지원군을 포위하여 섬멸하려는 작전을 세웠다. 예비부대였던 제187보병연대가 5월 21일 홍천 일대에 투입되었다.[5] 제8군 사령부는 화촌면에 주둔한 미국 제1해병사단에 파로호 동쪽으로 진출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파로호 전투와 동시에 제1해병사단은 5월 23일부터 반격 작전에 참여했다. 5월 24일 가리산을 확보한 미국 제1해병사단은 28일 소양강을 돌파하고 파로호 동쪽으로 진출한 뒤 홍천-인제간 도로를 따라 진격하여 5월 31일 양구 시가지를 확보하였다.[6]
춘계공세 직후 중국인민지원군은 양구-인제 지역에서 지연전을 개시해 조선인민군을 전방에 내세우는 전략을 택했다.[6] 하지만 캔자스선 진출을 목표로 할 당시,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은 태백산맥 일대의 험준한 지형을 활용해 고지 여러 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이 지역을 방어거점으로 삼았다.[7] 펑더화이는 마지막까지 고지를 사수할 것을 독려했다.[7]
유엔군사령부는 토페카선에 도달하자 다음 목표선을 캔자스선으로 명명하고 6월 17일까지 이 목표선에 도달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양구-인제 지역은 제10군단의 주요 교통지역으로 지정되었다. 미국 제1해병사단은 군단의 목표에 따라 캔자스선을 향해 진격했으나 캔자스선 전방에 위치한 610고지에서 미국 공군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민지원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해 큰 피해를 입었다.[8]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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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산은 양구군과 인제군의 경계에 위치하는 높이 1,148m의 산으로, 대암산·대우산 천연보호구역과 함께 양구군 동쪽 산지를 이루는 산 중 하나이자 태백산맥을 구성하는 산 중 하나다.[9][10] 양구군을 비롯한 강원도 일대 태백산맥은 산악지로 분류되며,[11] 경사도와 기복량은 한반도 내에서 높은 축에 속한다.[12] 또한 태백산맥 서측에 위치한 도시의 경우, 연평균 안개일수가 100일 이상인 곳이 많다.[13][a]
유엔군의 섬멸 작전에 따라 미국 제1해병사단이 캔자스선까지 진출하기 위해서는 도솔산-대암산 산줄기 옆에 난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진격해야 했다. 당시 미국 제1해병사단이 담당한 구역 동쪽에는 대암산과 도솔산, 대우산을 비롯한 500m에서 1,200m 사이의 산악 지형이 있었다.[15] 이 산악 지형은 미국 제1해병사단과 대한민국 제5사단 간 군 경계선이었다.[16] 도솔산 능선 양쪽의 협곡과 골짜기를 따라 38선 이북으로 진출하는 도로가 있었기 때문에, 유엔군의 전체적 작전을 위해서는 도솔산 일대의 적을 소탕할 필요가 있었다.[17]
전투
[편집]제1해병연대 투입과 고전
[편집]1951년 6월 1일부터 미국 제1해병사단이 680고지와 692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공군을 동원해 공격을 개시했으나, 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조선인민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692고지는 포기한 채 후퇴해야 했다.[18] 1951년 6월 4일 대한민국 해병대 제1해병연대는 미국 제1해병사단 제5연대의 압박을 완화하기 위해 작전에 투입되었다.[19] 미국 제5해병연대는 강원도 인제군 서화리로 이동했고 임무는 제1해병연대 당시 제1해병연대는 김대식이 이끌었다.[20] 제1해병연대의 목표는 도솔산과 인근 23개 고지에 있는 조선인민군 제12사단과 제32사단을 섬멸하여 해안분지로의 진격로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1951년 6월 4일부터 6월 10일까지 제1해병연대는 부대를 나눠 제1대대와 제2대대가 적의 방어진지를 양방향에서 공격하고, 제3대대는 동쪽으로 이동해 능선을 따라 적을 공격했다. 조선인민군 제12사단은 방어진지의 험준함과 이를 돌파하려는 시도가 전략적으로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적의 완강한 방어와 좁은 산길, 그리고 상당한 높이로 인해 해병대는 돌파구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교두보를 마련하자마자 적이 반격을 가해 전투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21]
야간 공격과 해병대의 승리
[편집]1951년 6월 10일 오후 제1해병연대 참모가 모여 상황 타개를 위해 작전을 논의했다.[7] 6월 10일 오후 8시, 제1해병연대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주간 작전에서 야간 작전으로 전환해 적을 기습공격하기로 결정했다. 6월 11일 오전 2시 조선인민군은 모든 부대를 후방으로 배치한 상황이었고, 제1해병연대 3개 대대는 이를 통해 돌파가 어려웠던 적의 주저항선을 연이어 돌파하여 1122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22] 1122고지를 점령한 제1해병연대는 공격에 노출된 대암산 주변 능선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23]
6월 15일 제1해병연대는 더 좋은 지역을 선점하기 위해 공격을 재개했다. 6월 15일 제1해병연대 제2대대가 대암산을 공격하여 6월 16일 점령했고,[23] 6월 20일 도솔산을 제3대대가 점령하면서 전투는 해병대의 승리로 끝났다.[24] 해병대의 도솔산 점령 이후 조선인민군 제12사단은 능선을 따라 도솔산에서 철수하고 해안분지 서쪽 고지인 대우산으로 이동해 방어를 강화했다.[7]
제주어 무선 교신
[편집]전투 도중 인민군은 대한민국 해병대의 무전기를 노획하기도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통신 보안에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마침 대한민국 해병대의 주력이 제주특별자치도에서 모집되었다는 점을 고려해 일부러 제주어로 무선 교신을 하게끔 하였다. 당시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아 인민군에는 제주어를 이해하는 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전투 당시 대대장이었던 공정식은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 해병대가 코드 토커를 이용했음을 참조하여 이 작전을 건의했었고, 실제로 시행되었다.
한동안 알려지지 않았다가, 2008년 공정식이 이 사실을 담은 기고문을 국방일보에 공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고, 대한민국 해병대도 당시 참전 장병들의 증언을 통해 사실임을 확인했다.[25]
영향
[편집]후속 작전
[편집]도솔산과 대암산이 확보되면서, 미국 제1해병사단 역시 캔자스선으로 진출을 시도했지만 험준한 지형과 적의 매복으로 상당히 고전했다. 미국 제1해병사단 역시 6월 20일 캔자스선에 도달하였다.[26] 1951년 7월 8일부터 7월 10일까지 제1해병연대는 조선인민군 제12사단이 후퇴한 대우산을 점령하기 위해 전투를 치렀지만 사상자를 낸 채 작전은 취소되었다. 이후 대우산 일대에서 피의 능선 전투,[27] 단장의 능선 전투, 펀치볼 전투[28] 등 1951년 중후반 유엔군과 공산군의 고지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기념
[편집]전투 직후인 1951년 8월 19일 이승만 대통령은 제1해병연대에게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29] 이후 국가보훈부에서는 도솔산지구 전투에 참전한 여러 해병을 이달의 호국인물로 선정하고 그들을 기념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2001년 12월 이달의 호국인물에 선정된 김동하 해병 중장,[30] 그리고 1999년 9월과 2016년 9월에 이달의 호국인물에 선정된 강길영 소위 등이 있다.
대한민국 해병대는 1953년 3월 자체적으로 6.25 전쟁 당시 해병대에서 큰 공훈을 세웠다고 평가한 해병대 5대 작전을 선정했고, 여기에 도솔산지구 전투가 포함되었다.[31] 1981년 8월 21일 해군본부가 도솔산 정상에 도솔산 지구 전투 전적비를 건립했고 양구군이 1991년 동면 비아리로 이전했다.[32] 해병대는 또한 1998년부터 도솔산전적문화제를 양구군에 개최하면서 도솔산 전투를 기념하였고,[33] 2014년부터 해당 행사를 '도솔산지구 전투 전승행사'로 이름을 바꿔 현재도 전승행사로 기념하고 있다.[34]
1999년 6월 20일에는 펀치볼 일대에 펀치볼 전투와 도솔산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전적비가 건립되었고,[35] 1년 뒤인 2000년 6월 20일에는 6.25 전쟁 당시 도솔산 전투를 비롯하여 양구군에서 벌어진 9개의 큰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양구 전쟁기념관이 건립되었다.[36]
같이 보기
[편집]- 후속 작전
- 참여 부대
참조
[편집]내용주
[편집]각주
[편집]- ↑ President (1945-1953 : Truman). Office of the President. 4/1945-1/20/1953, 《Department of State Chronology of Principal Events Relating to the Korean Conflict, June 1951, Research Project No. 253》, Korean War Files (Truman Administration)
- ↑ Mossman, Billy (1988).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Ebb and Flow November 1950-July 1951》. United State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465쪽.
- ↑ “현리전투”. 2026년 1월 1일에 확인함.
- ↑ 국방군사연구소 2010, 74쪽.
- ↑ Montross 1962, 127쪽.
- 1 2 Montross 1962, 129쪽.
- 1 2 3 4 “도솔산지구 전투전적비”. 2026년 1월 1일에 확인함.
- ↑ Montross 1962, 138~142쪽.
- ↑ 양구군청 관광문화과 (2021년 8월 17일). “둘러볼구양 > 힐링명소 > 도솔산”. 《양구올구양》. 양구군청. 2026년 1월 1일에 확인함.
- ↑ “도솔산”. 2026년 1월 1일에 확인함.
- ↑ 대한산악회 2019.
- ↑ 국토지리정보원 (2021년 3월 29일). 《대한민국 국가지도집 제2권 자연환경과 국토》. 국토지리정보원. 17쪽.
- ↑ “기상자료개방포털 안개일수 기간조회”. 《기상자료개방포털》. 기상청. 2026년 1월 1일에 확인함.
- ↑ Montross 1962, 148쪽.
- ↑ Montross 1962, 140쪽.
- ↑ Montross 1962, 139쪽.
- ↑ 허윤택. “도솔산지구 전투 (兜率山地區 戰鬪)”. Academy of Korean Studies.
- ↑ Montross 1962, 142쪽.
- ↑ Montross 1962, 144쪽.
- ↑ 국방부전사편집위원회 1970, 807쪽.
- ↑ Montross 1962, 146~147쪽.
- ↑ Montross 1962, 147쪽.
- 1 2 Daughtery III, Leo (2003). 《Train Wreckers and Ghost Killers: Allied Marines in the Korean War》. 미국 해병대 본부.
- ↑ 손문식 (1993년 1월 12일). 《한국전쟁전투사: 도솔산전투》. 국방연구소.
- ↑ 이혜리 (2017년 6월 25일). “6·25전쟁 도솔산 전투서 난데없는 제주어 ‘비밀 작전’”. 《서울신문》. 2026년 1월 3일에 확인함.
- ↑ Montross, 152쪽.
- ↑ Hermes, Walter (1992).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 United State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84–5쪽. ISBN 9781410224842. 2012년 9월 2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이 문서는 퍼블릭 도메인 출처의 본문을 포함합니다. - ↑ Montandon, Joshua W. (2007). 《Battle for the Punchbowl: The U. S. First Marine Division's 1951 Fall Offensive of the Korean War》. University of North Texas. 33쪽.
- ↑ “도솔산전투”. 2026년 1월 1일에 확인함.
- ↑ “이 달의 호국 인물 2001년 12월 호국인물 김동하”. 《전쟁기념사업회》. 2001년 12월 1일. 2026년 1월 1일에 확인함.
- ↑ “해병대7대작전”. 《대한민국 해병대》. 2026년 1월 1일에 확인함.
- ↑ 박재혁 (2025년 6월 9일). “양구 도솔산지구전투”. 《강원도민일보》. 2026년 1월 1일에 확인함.
- ↑ 이해용 (1999년 5월 28일). “<지방안테나> 해병대 신화 도솔산 전적문화제 개최”. 《연합뉴스》. 2026년 1월 1일에 확인함.
- ↑ 정현규 (2014년 6월 4일). “[강원 양구]6월의 가볼만한 곳③”. 《데일리안》. 2026년 1월 1일에 확인함.
- ↑ 이해용 (1999년 6월 18일). “<카메라뉴스> 무적해병 신화 도솔산 전적비 건립”. 《연합뉴스》. 2026년 1월 1일에 확인함.
- ↑ 최창순 (1999년 6월 18일). “[강원]민통선 양구 '전쟁기념관' 내달 20일 개관”. 《동아일보》. 2026년 1월 1일에 확인함.
참고 문헌
[편집]- 군기록물
- Montross, Lynn; Hurbard, Kuokka (1962). 《The East-Central Front》. 미국 해병대 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