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홀라 호메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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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홀라 호메이니 روحالله خمین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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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홀라 호메이니(1989년 이전) | |
| 이란의 제1대 라흐바르 | |
| 임기 | 1979년 12월 3일~1989년 6월 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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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임: 알리 하메네이(제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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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상정보 | |
| 출생일 | 1900년 9월 24일 |
| 출생지 | 카자르 제국 호메인 |
| 사망일 | 1989년 6월 3일(86세) |
| 사망지 | 이란 테헤란 |
| 정당 | 이슬람 공화당 |
| 배우자 | 카제흐 사카피 |
| 자녀 | 모스타파, 자흐라 |
| 종교 | 이슬람(시아파) |
| 서명 | |
세예드 루홀라 무사비 호메이니(1900년 9월 24일~1989년 6월 3일, 페르시아어: سید روحالله موسوی خمینی)는 이란의 혁명가, 사상가, 시아파 종교인이며, 1979년 이란의 샤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를 몰아낸 이란 이슬람 혁명의 국가지도자이다. 이란 혁명의 상징이자 1979년, 1981년 이후 이란의 통치자였다. 하피즈이자 12이맘 시아파의 고위 성직자, 아야톨라, 마르자("모범의 원천"), 무즈타히드이며, 파키하(이슬람 율법 전문가)였고, 4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공식적인 칭호는 이맘 호메이니로 알려져 있다. 본명은 루홀라 무사비(페르시아어: روحالله موسوی)이다.
1922년경 쿰에 정착했으며, 1930년경 고향인 호메인의 이름을 자신의 성으로 사용, 개명했다. 1950년대 종교 지도자인 아야톨라로 추대되고, 1960년 초에는 대 아야톨라로 추대됐으며, 이란 내 시아파 종교 공동체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1963년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 국왕의 백색혁명과 이슬람 성원의 토지, 재산 몰수와 여성 참정권 허용 정책 등에 반대하여 투옥됐다가 망명했다. 1964년부터 이라크 나자프에서 지속적으로 왕정 비판운동을 전개했다. 1971년 국외에서 페르세폴리스의 이란 건국 2500년 축제를 반대하는 데모를 지도했고, 1978년 사담 후세인에 의해 이라크에서 추방되자, 프랑스로 망명, 프랑스 파리 교외 노프르르 샤토에 머무르며, 그 곳에서 이란 혁명을 지도하였다.
1970년대 중반부터 팔라비 왕조에 대한 이란 국민의 불만이 계속되자, 이란 내 그의 영향력은 급증했다. 1979년 1월 16일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 국왕의 퇴위 후, 2월 1일에 귀국하여 사망할 때까지 이란의 최고지도자인 라흐바르로 군림하였다.
호메이니는 많은 시아파 무슬림들에게 영적 지도자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지지자들은 이 관례에 집착했다. 또한 그는 자신에게도 엄격하여 율법과 교리에 위반되는 행동과 작은 뇌물 수수조차 엄격하게 거절하였으며, 측근들과 친척들의 비리에도 냉혹하게 대처하였다.
1981년에는 군사 최고지도자직도 겸하여 이란-이라크 전쟁을 지휘하였다. 영국 소설가 살만 루슈디가 소설 《사탄의 시》를 발표하자, 그는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를 신성모독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루슈디의 처형을 요구하는 파트와를 발표했다. 또한 그는 미국을 대(大) 사탄이라 불렀다.
호메이니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중 하나로 1979년 타임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생애
[편집]가계
[편집]호메이니는 1900년 9월 24일 이란 숭고국의 중부 지방 호메인 마을에서 학자였던 아버지 모스타파 무사비의 6형제 중 막내로, 루홀라 무사비(페르시아어: روحالله موسوی)란 이름으로 태어났다. 5월 17일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그의 이름은 '알라의 정신'이라는 뜻을 가진 루홀라로 정해졌다. 그의 조상은 이란의 토지 소유자, 성직자, 상인 가문이었다가, 수백년 전 종교 교육을 감독하기 위해 시아파 무슬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인도의 러크나우 지방으로 이주했던 페르시아인이었는데, 19세기 중반 그의 할아버지가 시아파 성지 나자프로 순례를 다녀오던 중 이란 아와드 왕국에 정착하였다. 그의 가족은 아와드의 수도인 러크나우 근처 킨투르에 정착했다. 할아버지 아흐마드 힌디는 1834년 호메인에 집을 마련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시아파 종교지도자인 물라였다. 그러나 1901년 아버지를 잃었는데, 그의 아버지 모스타파 무사비가 농업 용수(農業用手) 시비에 말려들어 지방 영주의 명령으로 살해되자 그는 어머니 아가 카눔, 숙모 사헤베트, 형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아라크, 쿰 학원에서 수학했다.
소년기
[편집]루홀라는 6세에 쿠란 과 초급 페르시아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해 그는 지역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종교, 노헤흐 카니(애도 낭송) 및 기타 전통 과목을 배웠다.어린 시절 내내 그는 어머니의 사촌인 자파르와 성직자이자 시인인 이복형 모르테자 파산디데를 포함한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신앙 교육을 계속했다.[1] 그는 소년기에 이라크의 마드라사에 유학하여 압둘 카림 하에리에게 사사(師事)하였고, 1920년 스승 압둘 하에리가 콤에다 파이지자 학원을 설립하자 그를 따라 동행하였다.
1922년경 그는 쿰에 정착했다. 쿰 신학교에서 그는 알리 아크바르 야즈디 의 지도를 받았다. 아크바르 야즈디는 1924년에 사망했지만 호메이니는 자바드 아가 말레키 타브리지, 라피이 카즈비니라는 두 명의 다른 스승과 함께 철학에 대한 지도를 받았다.
1930년경 이름을 루홀라 호메이니로 개명했는데, 자신의 고향인 호메인의 이름을 자신의 성으로 사용했다. 시아파 학자이자 교사로 활동했으며, 이슬람 철학, 윤리학, 법률에 관한 글을 썼다. 1930년대 후반 국왕 레자 샤 팔레비의 세속주의적 정책, 이슬람 종교 세력 탄압에 저항하였다.
철학과 작시
[편집]호메이니는 고대 그리스 철학도 공부했으며, 논리학의 창시자로 여겼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도 읽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2]과 "신성 분야"에서 "진중하고 견고하다"고 평가했던 플라톤의 철학[3] 모두를 접하고 그 영향을 받았다. 이슬람 철학자 중에서는 아비센나 와 물라 사드라 의 영향을 주로 받았다.[2]
철학 외에도 호메이니는 문학과 시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시집은 사후에 출간되었다. 청소년기부터 신비주의적이고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시를 썼던 그는, 시집 세 권, 즉 《친밀한 사람》(The Confidant), 《사랑의 잔》(The Decanter of Love)과 《전환점》(Turning Point), 그리고 《디반》(Divan)에 시를 썼다.[4] 그의 시에 대한 지식 은 현대 시인 나 데르 나데르푸르 (1929~2000)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는 "1960년대 초 호메이니와 오랜 시간 시를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Naderpour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우리는 4시간 동안 시를 낭송했습니다. 내가 어떤 시인의 시를 낭송할 때마다 그는 다음 시를 낭송했습니다.[5]" 한다.
종교 지도자
[편집]이슬람 시아파 지도자
[편집]그는 신학교에서 종종 당시의 실질적인 사회 및 정치 문제에 대한 종교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1940년대에는 세속주의에 반대하는 활동을 했다.
1941년 《비밀의 폭로 Kashifi asrar》를 저술, 발표하여 왕정을 비판하며 동시에 외국의 침략을 비난하였다. 호메이니는 1950년대 후반 아야톨라 칭호를 받았으며, 1963년 이슬람교 시아파의 지도자 아야톨라 세예드 후세인 보루제르디가 죽자, 샤리아트마다리, 밀라니 등과 함께 시아파의 중요 지도자 3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60년대 초에는 대(大) 아야톨라로 추대되어, 이란 내 시아파 이슬람 종교 공동체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1962년과 1963년, 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백색 혁명"을 단행했는데, 토지 개혁으로 이슬람 성원의 토지를 축소하고 1936년부터 진행중이던 여성 해방 정책을 유지하자, 그는 반대했다.
1963년 1월 26일 무하마드 레자 팔레비는 백색 혁명을 발표, 삼림 국유화, 공기업의 민간 매각 및 민영화, 산업 이익 분배, 전국 학교의 문맹 퇴치 운동, 비 무슬림들의 이란 공직 임명을 허용하는 제도 개정안 등을 추진하자, 그는 이를 부정하였다. 호메이니는 이를 "이슬람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했다.[6] 그는 국왕 무하마드 레자 팔레비의 백색 혁명에 반대하는 데모를 조직하였다.
호메이니는 샤의 정책을 계속해서 비난하며, 다른 8명의 저명한 시아파 종교 학자들의 서명이 담긴 공동 선언문을 발표했다. 호메이니의 선언문은 샤의 정책을 두고 국가 내 도덕적 타락의 확산이라 규탄하며, 미국과 이스라엘에 굴복했다고 비난했다.
그는 팔레비 왕정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반대 시위를 조직했다가 체포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가 체포되자 반정부 폭동이 야기되었다. 이듬 해인 1964년에 석방된 호메이니는 팔라비 왕조와 친교하던 미국을 비난하였고, 이 사건으로 그는 1964년 11월 4일 튀르키예로 또다시 강제 추방되었다.
1964년 11월 4일부터 튀르키예의 부르사에 있는 튀르키예 군사 정보부 소속 알리 체티네르 대령의 집에 머물렀다. 그는 서구 문명의 영향력에 대한 공공연한 비판, 이슬람교 교리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외쳤다. 또한 그는 미국을 대 사탄이라 불렀다. 그에게는 많은 추종자들이 나타났다.
터키, 이라크, 프랑스 망명 생활
[편집]1965년에 호메이니는 이라크로 망명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 이후 이라크에서 쫓겨나게되는 1978년까지 그는 이라크의 시아파 성지 나자프에 머물렀다. 이후 이라크에 있는 시아파 성지인 안나자프에 살면서 팔라비의 퇴위와 이란에 이슬람 공화국의 설립을 계속 요구, 호소했다. 1971년 이라크에 체류 중이던 그는 이란의 페르세폴리스의 이란 건국 2500년 기념 축제를 반대하는 데모를 사주했다.
1978년 10월 6일 그는 이라크의 지도자 사담 후세인에 의해 강제 출국당했다. 이라크에서 쫓겨나자 그는 관광 비자로 프랑스 파리 교외의 노플르샤토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호메이니의 추종자들은 테이프로 녹음된 그의 메시지를 이란 국민에게 보냈다. 그의 글, 저술, 설교는 이란에서 금지 당했지만 비밀리에 널리 유포되었고, 갈수록 그의 영향력이 커졌다.
알렉상드르 드 마렝슈 당시 프랑스 비밀 정보부 부장에 따르면, 프랑스는 팔라비에게 팔라비 왕조의 신변을 위해 호메이니 암살을 제안했으나, 팔라비는 이 계획이 그를 순교자로 만들 수 있다며 거절했다고 했다.
저명한 혁명 철학자 알리 샤리아티의 암살 후, 호메이니는 샤 정권에 맞선 가장 영향력있는 지도자 중 하나로 떠올랐으며, 샤의 지배에 대항하는 영적 지도자로 받아들여졌다.
망명생활 중 호메이니는 벨레야테 파키(이슬람 법학자의 후견권)이란 책을 저술했다. 이 책은 이슬람 사회의 모든 법은 이슬람법에 기초해야만 하고, 모든 법과 활동은 이슬람 율법의 이맘 기관(수호자)에 의해 감독되어야 하며, 이슬람 국가들은 공화국이어야 하며 왕조가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그의 사상을 기술하고 있다.
호메이니는 이슬람 공화국의 지도자는 성직자 집단에 의해 선택된 파키(이슬람 법학자)여야만 한다고 믿었다. 이 파키는 절대권력을 가져야만 하며, 같은 성직자 집단에 의해서만 권력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다. 대중은 파키를 선출하지 못하지만,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헌법에 따라 이란 국민들은 매 8년마다 이란 파키 회의라고 불리는 일단의 성직자들을 선출하며, 이들이 파키를 선출한다. 이란의 지도자는 일반적으로 "최고 지도자"라고 불린다.
이 책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궁극적인 정치적 구조에 대한 통찰력을 제시하였다. 호메이니는 샤의 전제왕조를 성직자들이 지배하는 종교 체제로 대체했다.
이란으로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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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후반의 대규모 시위, 파업, 시민반란 등으로 1979년 1월 16일 팔라비가 이란 혁명으로 퇴위하자, 2주 후인 1979년 2월 1일 15년의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이란으로 돌아왔다. 1979년 1월 16일 그는 이란 민중의 지지를 얻어 이란의 최고지도자에 선임되었다. 국왕 퇴위 직전 1월 6일에 총리에 임명된 샤푸르 바크티아르가 임시로 내각을 운영했지만 실권은 그에게 있었다. 그는 직책을 맡지는 않았지만 1980년 2월 1일 초대 대통령 취임 시까지는 사실상의 정부 수반 역할을 하며 각국의 사절단, 외교관들을 접견하였다. 호메이니는 샤 무하마드 레자 팔레비가 임명한 샤푸르 바크티아르를 축출하고, 자신의 측근 메흐디 바자르간을 총리로 추천 그를 총리에 앉혔으며, 그를 거역하는 이는 알라를 거역하는 것과 같다고 선언했다. 그해 2월 1일 테헤란에 도착했다.
당시 서양 매체들은 6백만~8백만 명의 혁명세력이 그를 환영한 것으로 추산하였다. 1979년 2월 5일 그는 새 이란 정부를 구성하고 2월 11일 호메이니는 메흐디 바자르간을 총리로 한 임시 정부를 수립한다. 3월 1일에는 쿰에 있는 집을 되찾았다. 1979년 3월 30일과 3월 31일, 임시 정부는 16세 이상의 모든 이란 국민에게 새 정부형태로서 이슬람 공화국의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한다. 98% 이상이 왕정을 이슬람 공화국으로 교체하는 데 찬성하였다. 새로 작성된 헌법 초안을 승인하기 위한 선거들이 뒤이어 치러졌다.
이란 혁명 당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왕정 반대파의 선봉에 서 있었고, 다수였다. 그런데 왕정 반대 운동을 한 사람들 중에는 자유주의자도 있었고, 사회주의자도 있었고, 심지어 공산주의자들도 있었다. 많은 이들이 민주주의가 다스리는 세속 국가를 원했다. 그러나 다수였던 이슬람이 우위에 서게 됐다.
헌법은 최고지도자와 함께, 매 4년마다 선출되는 대통령을 규정하고 있으나, 수호 위원회에 의해 간접적으로 승인된 후보들만 취임할 수 있다. 호메이니 자신은 "혁명 지도자"로서 종신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1980년 2월 4일 아볼하산 바니사드르가 초대 이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집권
[편집]집권 초기
[편집]가장 훌륭한 종교 법학자에게 국가 지도권이 위임되어야 한다는 십이이맘파의 베라야테 파키의 이념에 의해 그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최고지도자로 추대되었다. 그는 시아파 성직자들을 정부에 참여하게 하여 주로 정책결정을 담당하게 했다. 호메이니는 다양한 혁명 분파들을 중재, 조율하면서 중요한 사안에 관해서만 관여, 최종결정을 내렸다.
집권 초기 우선 정치보복을 가해 팔라비 왕조을 위해 일했던 수백 명의 관료, 협력자들을 사형에 처했다. 또한 나머지 이란 국내 반대세력을 적발, 색출하여 조직적으로 투옥하거나 살해했다. 그는 여성의 얼굴을 베일로 가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호메이니의 명령에 따라 이란 여성은 베일로 얼굴을 가려야 했다. 또한 서양 음악 연주 금지, 음주가 금지되었고, 이슬람 율법에 규정된 형벌을 사회에 적용했다.
호메이니가 추구한 외교정책의 주요목표는 팔라비의 친미국, 친유럽 정책을 포기했고, 미국에 대해 확실한 적대적 태도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이슬람 근본주의를 이란을 넘어, 이웃 다른 이슬람 국가에도 전파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그는 자신에게도 엄격하여 율법과 교리에 위반되는 행동과 작은 뇌물 수수조차 엄격하게 거절하였으며, 측근들과 친척들의 비리에도 냉혹하게 대처하였다.
인질 사건
[편집]1979년 11월 4일, 호메이니의 열렬한 추종자들로 구성된 일단의 학생들이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을 급습하여 63명의 미국인을 인질로 잡았다. 추가로 세명의 인질이 이란 외무부에서 잡혔다.
63명의 인질 중 13명이 2주 안에, 그리고 1980년 7월에 한 명이 추가로 석방되었다. 나머지 남자 50명과 여자 2명은 444일간 억류되어 있었는데, 이를 가리켜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라고 부른다.
미국 대사관 점거자들은 그들의 행동을 통치기간중의 부정부패 행위 재판을 위해 팔라비를 넘기라는 요구를 미국이 거절한 데 대한 대응이라고 정당화했다. 호메이니 지지자들은 대사관을 '스파이 소굴'이라고 이름붙이고, 대사관에서 찾아낸 50권 분량의 비밀문서를 공개출판하였다. 12월의 국민투표 후 신헌법이 통과되고, 이란에는 이슬람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80년 2월 23일, 호메이니는 이란의 마즐리스가 미대사관 인질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는 한편, 재판을 위해 샤를 이란측에 넘기라고 미국에게 재차 요구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인질구출을 위한 특수작전을 강행했지만, 이 시도는 현지 상황에 대한 정보부족과 어설픈 사전준비, 급조된 지휘체계 등으로 실행전부터 삐걱거리다가 타바스(tabas)사막의 혹독한 기상상황에 이란군의 미사일에 헬리콥터가 격추, 추락하면서 잔해만 남긴 채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이란 육군의 소형 미사일에 헬리콥터들이 격추당한 이 사건의 충격으로 미군은 특수전 부대에 대대적인 구조개편을 실시하였다.)
이란인들은 이것을 거의 기적으로 받아들였다. 많은 논평자들이 이 실패를 지미 카터가 1980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실패하고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하게 된 주요 원인으로 지적했다.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와의 갈등
[편집]샤 팔라비 국왕의 이슬람 성원의 토지, 재산 몰수와 여성 참정권 허용 정책에 반대하는 이슬람 보수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어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직에 취임해달라는 요청은 사양하였다.
민심을 수습하는데 성공한 호메이니는 1980년 1월 25일을 대통령 선거일로 지정했다. 1월 25일에 실시된 선거에서 호메이니의 측근이자 경제학자, 외교가였던 아볼하산 바니사드르가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여성의 지지를 많이 얻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호메이니는 그의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는 것을 싫어했고, 의회는 보수주의 성향의 이슬람교 성직자가 다수를 차지했다. 의회는 곧 아볼하산 바니사드르를 견제하기 위해, 그와 대립 관계에 있었으며 보수주의자였던 모하마드 알리 라자이를 총리로 선출했다. 세속화, 여성 참정권 등의 정책을 추진하려던 아볼하산 바니사드르는 1981년 6월 21일에 의회로부터 탄핵당하고 7월 28일에 이란을 비밀리에 탈출하였다.
동시에 1978년부터 1981년 사이에 이란 내의 일부 사회주의자 성향의 지식인들과 왕정 지지자, 그밖에 자유주의자들도 이란을 대부분 떠나기 시작하였다.
이란-이라크 전쟁
[편집]1979년 당시 이란이 이슬람 혁명이 일어났을 때 이라크에서는 사담 후세인 바트당 정권이 집권 중이었다. 이슬람혁명으로 이란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미국과 서방세계는 후세인 정권을 지원하여, 이란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미국과 서방세계의 지원하에 이란과 이라크 사이에 국경분쟁이 1980년 9월에 이르러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는 사람 후세인이 먼저 이란을 공격했다며, 이란-이라크 전쟁의 평화적 해결을 거부하였다.
"사담 후세인은 영토를 넓히려는 욕심과 돈 때문에 우리를 침공하였으며 특히 유전이 많은 쿠제스탄을 점령하려 하였다."라고 지금도 이란은 이렇게 주장한다.
더군다나 이란은 미국과의 국교를 공식적으로 단절한 바가 있어서 미국은 오히려 이라크와 사담 후세인을 지원한다. 하지만 이란의 군사력도 만만치 않았다. 1981년 이란은 국민투표를 통해 호메이니는 군사 최고 지도자로 추대하여 군사 지휘권을 부여하였다. 아볼하산 바니사드르의 퇴진 후 사실상의 최고지도자로 추대되었다.
그는 이라크의 지도자 사담 후세인을 실각시키기 위해 전쟁의 연장을 주장했다. 이때 호메이니의 인기와 권력은 더 이상 필적(匹敵)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전쟁은 쌍방간에 큰 피해만 남긴 채 승패없이 끝났다.
죽음
[편집]1988년 정전 요청에 호메이니가 찬성하여 이란-이라크 전쟁은 종전되었다. 이란의 승리는 확실했지만 이란-이라크 전쟁에서의 호메이니의 승리는 효과가 없었다.
1989년 6월 3일 노년의 호메이니는 투병 중 입원한 테헤란 북부 병원에서 밤 10시경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사실은 다음 날 오전 새벽에 라디오를 통해 일반에 널리 알려졌다. 그의 시신은 이틀 뒤인 6월 5일에 테헤란 북부 언덕의 황야로 옮겨졌고, 곧이어 엄청난 숫자의 추모객들이 몰려들었다. 대중의 추모를 마친 호메이니의 시신은 헬기를 이용해 테헤란에 위치한 이란의 최대 공동묘지 '베헤시트 에 자흐라'(Behesht-e Zahra)로 옮겨졌다.[7]
같은 해에 이란 정부는 베헤시트 에 자흐라 인근에 호메이니를 위한 별도의 묘역을 건설한다는 계획에 착수하였다. 이는 높이 90미터에 달하는 4개의 첨탑과 황금빛의 돔이 씌워진 이슬람 사원의 형태를 지닌 루홀라 호메이니 묘의 건설로 이어졌다.[8]: 210
저작
[편집]- 《비밀의 폭로 (Kashifi asrar)》 (1941)
- 《벨라야트-에 파키흐》
- 《1971년 법치국가》 (1971)
평가와 사건들
[편집]악마의 시 사건
[편집]그는 일평생 자신에게도 엄격하여 율법과 교리에 어긋나는 행동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가족, 친지, 측근들조차도 교리나 율법에 반하는 행동과 작은 뇌물수수도 용납하지 않고 처벌하거나 단죄하였다.
그의 이런 엄격함을 싫어하던 영국의 작가 살만 루슈디는 1989년 9월 26일 영국에서 이슬람 교리를 소재로 한 《악마의 시》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범 아랍권 인물들 및 일부 이슬람인들은 살만 루슈디에게 자객을 보내거나 자발적으로 살만 루슈디를 찾아가 처형하려 하여 논란이 되었다.
호메이니는 살만 루슈디가 악마의 시 책에서 예언자 무함마드는 일찍이 메카의 다신교의 신을 인정하는 장귀를 읽어 내렸던 일을 두고, 그 장귀를 신의 예언에 의하는 것은 아니고 악마에 의하는 것이라고 풍자한 것에 분노하여, 1989년 2월 14일 살만 루슈디에 대한 궐석 재판을 열고 루슈디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영국과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첩보원을 동원해 살만 루슈디의 신변을 보호하였다.
호메이니 치하의 삶
[편집]이슬람교 율법 강화를 주장한 호메이니는 남녀 관계 없이 이슬람교 율법을 준수하라고 명령했다. 이로 인해 언론과 출판의 자유는 크게 제한되었고, 왕당파와 일부 세력들은 호메이니로 인해 다른 나라로 떠나 버리고 말았다.
이 법률을 샤리아라고 부르는데 이로 인한 모순은 더욱 심각해졌다. 더군다나 해외의 회사들도 진출이 제한되기까지 하였고 호메이니식 통치는 결국 개인 숭배가 되고 말았다.
종교적인 규칙에 반대하는 자는 이맘이든 아니든 상관 없이 무조건 가혹한 징벌에 처해졌고, 이로 인해 전 세계의 인권 단체들은 호메이니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호메이니 역시 비판자들에 대해 강력한 고문과 사형마저 실시할 정도였다.
저작
[편집]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Reich, Bernard (1990). Political Leaders of the Contemporary Middle East and North Africa: A Biographical Dictionary. Greenwood Publishing Group. ISBN 0-313-26213-6., p. 310
- 1 2 “Philosophy as Viewed by Ruhollah Khomeini”. 《imamreza.net》. 2011년 6월 1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3월 19일에 확인함.
- ↑ Kashful-Asrar, p. 33 by Ruhollah Khomeini
- ↑ “Introduction of Iman's works”. 《irib.ir》. 2007년 10월 1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6월 29일에 확인함..
- ↑ Farhang Rajaee, Islamism and Modernism: The Changing Discourse in Iran, University of Texas Press, (2010), p. 116.
- ↑ Thornton, Ted. “History of the Middle East Database. The Arab-Israeli Wars 1948 - 1973”. 《nmhschool.org》. 2007년 12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5년 4월 17일에 확인함.
- ↑ 유달승 (2009년 3월 25일).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호메이니의 최후”. 《한겨레》 (서울). 2024년 6월 19일에 확인함.
- ↑ Rizvi, Kishwar (2003). “Religious icon and national symbol: the Tomb of Ayatollah Khomeini in Iran” [종교적 아이콘이자 국가적 심볼: 이란에 있는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무덤] (PDF) (영어). 《Muqarnas》 20: 209–224. JSTOR 1523333.
참고 문헌
[편집]- 이슬람 학자들
-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저작물: : 40가지 하디스(법률), 아다브 아스 살라트(신자의 규율), 지하드 아크바르(투쟁은 위대하다)
- 40가지 하디스
- 아타브 아스 살라트
- 지하드 아크바르
외부 링크
[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루홀라 호메이니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위키인용집에 루홀라 호메이니 관련 문서가 있습니다.- 네이버 캐스트 : 오늘의 인물 - 루홀라 호메이니
- 호메이니에 대한 이란 정부의 소개(PDF 형식)
- 호메이니의 당시 유언(PDF 형식)
- 호메이니가 주장한 원칙들(PDF 형식)
- 호메이니의 역사(PDF 형식)
- 영국 언론이 소개한 2001년 2월 4일자 제목 "호메이니의 교지가 3만명을 살해했다." 보관됨 2008-03-29 - 웨이백 머신
| 전임 (이란 공화국)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
제1대 이란의 최고지도자 1979년 1월 16일 ~ 1989년 6월 3일 |
후임 알리 하메네이 |
| 전임 샤푸르 바크티아르 |
이란의 임시 대통령 1979년 1월 16일 ~ 1980년 2월 4일 |
후임 아볼하산 바니사드르 |
| 전임 덩샤오핑 |
제53대 타임 올해의 인물 |
후임 로널드 레이건 |
| 전임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국왕) 아볼하산 바니사드르(대통령) |
이란의 국가 원수 1979년 1월 16일 ~ 1980년 2월 4일 1981년 6월 22일 ~ 1989년 6월 3일 |
후임 아볼하산 바니사드르(대통령) 알리 하메네이(라흐바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