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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이탈리아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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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전쟁 (엹은 빨강), 삼니움 전쟁 (분홍/주황), 피로스 전쟁 (상아), 제1차, 제2차 포에니 전쟁 (노랑과 초록) 등을 통해 기원전 500년부터 기원전 218년까지 로마의 이탈리아 정복. 갈리아 키살피나 (기원전 238년–기원전 146년)와 알프스 계곡 (기원전 16년–기원전 7년)은 이후에 추가됐다. 기원전 500년 때 로마 공화정은 짙은 빨강으로 표시.

로마의 이탈리아 정복로마가 작은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에서 이탈리아반도의 패자로 성장해 가는 일련의 분쟁을 다룬다. 로마의 전승에서는 사비니족과의 최초의 전쟁알바노 구릉 일대에서 라티움의 해안에 이르는 초기 정복을 로마의 왕들이 한 것이라 전한다. 기원전 509년 로마의 에트루리아 국왕을 몰아낸 뒤 로마 공화정의 탄생은 로마와 에트루리아 간 일련의 대규모 전쟁이 시작되었다. 기원전 390년에 이탈리아 북부의 갈리아인들이 로마를 약탈하는 사건이 있었다. 기원전 4세기 중엽 로마는 아펜니노 지역의 강력한 부족 연맹인 삼니움족을 계속해서 충돌했다.

이 전쟁이 끝날 무렵, 로마는 중부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었고 남쪽과 북쪽으로 팽창을 하기 시작했다. 타렌툼이 그리스의 왕 피로스에게 이탈리아 북부에 대한 전쟁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발생한 피로스 전쟁 (기원전 280년-275년) 중 로마의 헤게모니에 있어 마지막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었다. 기원전 265-264년 에트루리아의 저항이 마침내 분쇄되었고, 같은 해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여 로마의 세력을 처음으로 이탈리아 밖으로 끄집어냈다. 또한 제1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64년–241년)을 시작으로 시칠리아 (기원전 241년), 사르데냐코르시카 (기원전 238년) 등 섬들이 로마의 지배를 받는 영토에 포함되었고 속주로 전환되었다.

이후 제2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18년–기원전 202년)과 함께, 로마는 또한 갈리아 키살피나의 아펜니노산맥 이북 켈트족 영토를 복속시켰고 그런 다음 이웃한 베네티족 (동쪽)과 리구리아인 (서쪽)의 영토를 복속시켜 알프스산맥의 아래까지 이르렀다. 내전의 시대(기원전 44년–31년)가 종료됨에 따라,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16년부터 기원전 7년까지 알프스 일대의 계곡 (아오스타 계곡부터 이스트리아아르시아강)에 대한 정복에 착수하여 지리적 의미의 이탈리아 정복을 완수하였다. 알프스 산호 전역의 정복 이후, 그리고 알프스 지역 그리고 이탈리아 전역을 함께 묶어 그는 이탈리아를 11개 지역으로 나누었다 (서기 7년경). 정복된 영토는 몰수, 콜로니아의 설치, 완전 또는 부분적 로마 시민권의 부여, 그리고 명목상 독립 국가들과의 군사 동맹 체결 등 여러 방식으로 성장하던 로마의 영토로 통합되었다. 이탈리아의 성공적 정복은 로마에 어떤 동시대 국가들과 견줄 수 없는 인력 자원을 제공해주었고 최종적으로 지중해 전역에 대한 로마의 개입을 가능케 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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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팽창 및 이탈리아 정복 이전 철기 시대 이탈리아의 민족 언어 지도

이탈리아의 고대 민족들의 이름은 철기 시대와 로마의 팽창 및 이탈리아 정복 이전 시기 이탈리아반도에 정착한 인구 집단들을 나타낸다. 이 명칭 중의 다수는 학자들이 명명한 것이거나 고대 그리스어라틴어로 쓰인 고대 작가들의 문서에서 정한 타칭이다.

특정 이탈리아 부족 및 민족들의 고유 명칭에 대하여, 역사가들이 고대 이탈리아 민족들의 역사적으로 전해지는 명칭을 알고 있는 시간적 범위는 대체로 기원전 약 750년(전설 상의 로마 건국 시기)부터 기원전 약 200년(로마 공화정 중엽) 사이에 해당하며, 이 시기는 그러한 명칭들에 대한 문헌 기록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기이자, 이탈리아의 여러 민족이 로마 문화거의 완전히 동화되기 이전의 시기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족, 켈트족, 고대 그리스인 및 상기 언어 집단들 사이에서 다양한 중간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부족 등 이탈리아의 민족 및 부족들의 거의 전부는 인도유럽어를 구사했다. 한편으로 일부 이탈리아 민족 (라이티아족, 카무니족, 에트루리아인 등)은 비인도유럽어 및 선인도유럽어를 구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아프리카아시아어족를 구사하는 민족들, 구체적으로는 대개 셈족 계통의 페니키아인, 카르타고인 등이 이탈리아의 일부 해안 지역 (특히,사르데냐 서부와 남부 및 시칠리아 서부 등 이탈리아 도서 지역)에 정착 및 식민화하였다.[1]

일부 학자들은 많은 민족들이 비인도유럽어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 민족들 중 일부는 선인도유럽 언어고유럽 제어를 사용했을 것이며, 그 나머지에 대해서 자코모 데보토(Giacomo Devoto)는 주변 인도유럽어(인도유럽어와 비인도유럽어의 사이의 혼합적 성격을 가진 것들)라는 개념을 제시하기도 했다.[2]

로마의 '라티움 베투스' 정복 (기원전 753년-기원전 3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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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톨리니 미술관의 '카피톨리나 늑대상'. 전설에 의하면 암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기원전 753년에 로마를 건국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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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라티움 베투스'와 주요 거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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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00년의 이탈리아

작은 부족 마을[3]로서 로마의 건국부터 로마의 왕들의 몰락을 포함한 왕정 시대까지 대부분의 고대 로마 역사는 최소한으로만 남아있다.[4][5] 로마 역사가 리비우스의 저서 '로마 건국사'는 최초 정착부터 초기 시기까지 고전기 로마의 일곱 왕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 그 중에 초대부터 네 번째 왕들 (로물루스, 누마 폼필리우스,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안쿠스 마르키우스)등은 거의 확실히 전적으로 허구의 존재로 여겨진다.[6] 역사가들은 가설을 세우는데, 전통적인 제5대 왕인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시기 로마에 대한 에트루리아 지배 성립에 앞서,[6] 로마가 일종의 종교적 권위에 의해 좌지우지했다는 것이다.[7] 전설에 따르면, 로물루스는 도시를 세운 뒤에 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인 팔라티노 언덕을 요새화 했으며, 리비우스는 로마가 건국되자 "군사적 능력만으로는 주변 어느 도시와도 뒤지지 않았다"라고 하였다.[8]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등 에트루리아인 왕들 치하에서 로마는 북서쪽 방향으로 팽창하면서, 과거 전쟁을 끝냈던 협정이 만료된 뒤, 베이엔타니 (테베레강 북동쪽)와 분쟁에 휩싸였다.[9]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사비니인들과 충돌했으며 (기원전 585년/584년경), 그의 후임자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도 마찬가지였다.[10] 다시 한번 프리스쿠스는 라틴족 (코르니쿨룸콜라티아를 복속)[11][12]과 에트루리아인을 상대로 개선식을 다시 치렀다 (기원전 588년/587년 4월 1일).[13]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또한 에트루리아인을 상대로 두 번의 개선식을 치렀다 (기원전 571년/570년 11월 25일과 기원전 567년/566년 5월 25일). 그리고 최종적으로 스트라본은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가 언제나 아이퀴족의 수 많은 도시들을 파괴했다고 기록했다.[14] 로마의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처음에는 볼스키족과 싸웠고[15][16] 그 뒤에는 '라티움 베투스'의 수많은 도시들을 복속시키며, 에트루리아인들과 평화를 이뤘다.[15] 결국에 에트루리아이 왕들은 이 지역에서 에트루리아 세력이 전반적으로 약화되던 상황 속에서 폐위당하였고, 동시에 도시로부터 15마일을 넘지 않는 범위의 영토만을 보유[15]하고 있었던 로마는 공화정 체제를 스스로 채택하였다.[17][18]

이 새로운 역사적 국면의 시작과 함께, 로마와 직접적으로 이웃한 이들에는 로마와 유사한 부족적 구조를 지닌 라틴족 도시 및 마을이거나 인근 아펜니노 구릉지에 거주하던 사비니족의 부족들이 있었다.[19] 점차 로마는 에트루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거나 로마처럼 에트루리아 지배자들을 몰아낸 라틴 도시들 같은 지역 도시 국가 및 사비니족 모두를 복속시켰다. 로마는 라비니족투스쿨리족을 기원전 496년 레길루스 호수 전투에서,[20] 기원전 449년에 일어난 한 전투에서는 사비니족을, 기원전 458년의 알기두스산 전투와 기원전 446년의 코르비오 전투에서 아이퀴족과 볼스키족을, 코르비오네 전투에서 볼스키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고[21] 기원전 377년 안치오를 정복해냈으며,[22] 아리차에서는 아우룬키족을 복속시켰다.[23] 로마는 기원전 477년 크레메라 전투에서 베이에타니족에는 패배했고,[24] 기원전 435년에는 피데네를 정복했으나[25] 기원전 396년 베이 정복으로 이어진 전쟁에서 실패를 맛보기도 했다. 베이엔타니가 복속되자, 로마는 사실상 바로 인접한 에트루리아계 국가들의 정복을 완료하였으며,[26] 동시에, 아펜니노 구릉지의 부족 민족들이 초래하는 즉각적인 위협에 맞서 본인들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하지만 로마는 여전히 매우 적은 구역만을 다스렸고 로마의 활동은 이탈리아반도 전체 맥락으로 보았을 때는 미약하였는데 예시로 베이의 유적지가 오늘날 로마의 교외 지역에 완전히 들어가 포함되어 있는 점과[21] 로마의 이해관계가 이제서야 당시 선진 문화를 지닌 자들이던 그리스인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27] 이탈리아의 대부분은 여전히 라틴족, 사비니족, 삼니움족 및 다른 중부 이탈리아의 민족들, 마그나 그라이키아를 이루고 있는 '폴리스'들의 그리스 개척자들들의 통제에 있었으며, 특히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갈리아족을 포함한 켈트족의 수중에 있었다.

이 당시에 켈트 문명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으며, 군사적 그리고 영토적 확장을 펼치던 과정에서 응집력은 부족했으나 이들의 확산은 유럽 대륙의 대부분을 뒤덮었다. 바로 이 갈리아의 켈트족들의 손에 로마가 굴욕적 패배를 겪었으며, 이는 이어지는 로마의 팽창에 차질을 주었는데 이 패배의 기억은 로마의 의식과 후대의 기억에 깊이 각인될 운명이었다. 기원전 390년부터 여러 갈리아 부족들이 북쪽에서 이탈리아를 침입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모르고 있던 로마인들은 여전히 본질적으로 지역적 차원의 안보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 로마는 호전적인 부족이던[27] 세노네스족을 통해 알게 되었으며, 이들은 북쪽에서 에트루리아 영토인 시에나를 침입하였고 로마의 영향권에서 멀지 않은 클루시움(키우시)를 공격하였다.[28] 수적 및 사나움에 있어서 적들의 세력에 압도당한 키우시의 거주민들은 로마에 도움을 구했다. 거의 의도하지 않게[27] 로마인들은 세노네스족과의 분쟁에 휩싸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주요 목표가 되어버렸다.[28] 로마인들은 기원전 390년-387년경 알리아 전투에서 그들을 마주하게 되었다.[27] 브렌누스가 이끄는 이 갈리아인들은 약 15,000명의 로마군을 격파시키고[27] 패주하는 자들을 추격하여 도시 안으로까지 진입하면서, 로마는 부분적[29][30]이지만 치욕적인 약탈을 당했으며, 이후 그들을 몰아내거나 몸값을 지불한 뒤에야 떠나도록 설득시켰다.[27]

중부-남부 이탈리아에 대한 패권 (기원전 343년-기원전 26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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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납하는 병사를 실물 크기로 만든 에트루리아청동상 '토디의 마르스'. 기원전 5세기 초에서 말에 제작되었으며 바티칸 박물관에서 소장

로마 약탈 사건에서 회복한,[31] 로마인들은 즉시 이탈리아 내 팽창을 재개하였다.

중부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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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니움인들은 로마인들만큼이나 호전적이고 부유한 이들로[32] 로마와 가까운 비옥한 이탈리아 평야 지역으로 새로운 영토 확장을 꾀하려 했다.[33] 로마의 영토로 삼니움족의 광범위한 급습으로 기원전 343년과 341년 사이 제1차 삼니움 전쟁이 벌어졌으며,[34] 이에 가우루스산 전투 (기원전 342년)와 수에술라 전투 (기원전 341년) 등이 이어졌다. 로마인들은 삼니움에 승리를 거뒀지만, 라틴 전쟁으로 알려진 다수의 라틴계 도시들의 반란으로 인해, 그 성과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채 전쟁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35][36] 기원전 340년경 로마는 삼니움족의 영토 침입과, 격렬한 분쟁을 벌였던 라틴계 도시들의 반란이라는 두 가지 사태를 억제해야 했다. 최종적으로 라틴족들은 베수비우스 전투에서 그리고 트리파눔 전투에서 패하였으며,[36] 이후 라틴 도시들은 로마의 힘에 복속할 수밖에 없었다.[37][38]

기원전 327년부터 304년까지 제2차 삼니움 전쟁은 로마와 삼니움에 있어서 훨씬 심각하고 장기간의 전쟁이었으며,[39] 전쟁의 종결에는 20년이 넘는 기간과 24차례의 전투가 있으면서 양측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어야만 했다. 분쟁의 성쇠는 엎치락뒤치락하며 삼니움인들과 로마인 양측 모두에게 번갈아 가며 유리하게 작용했는데 삼니움인들은 기원전 327년에 나폴리를 장악했다가,[39] 로마가 이를 탈환해냈으나 이후 카우디움 전투[39][40] 라우툴라이 전투에서 패배를 당하고 만다. 로마인들은 마침내 보비아눔 전투 (기원전 305년)에서 승전을 거두는데, 이르면 기원전 314년부터 전쟁의 흐름이 로마에 유리하도록 바뀌며, 삼니움 측이 점차 불리한 조건에서 항복을 협상할 수밖에 없게 하였다. 기원전 304년에 로마인들은 삼니움 영토를 크게 합병하면서, 이곳에 여러 식민 도시를 세웠다. 하지만 삼니움의 패배 이후 7년 뒤, 삼니움 지역에 대한 로마의 지배가 확고한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 삼니움인들은 다시 들고 일어나 기원전 298년에 카메리눔 전투에서 로마인들을 격퇴시키며 제3차 삼니움 전쟁이 시작됐다. 이 성공으로 기세가 오른 삼니움인들은 로마가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 전체를 지배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한때 로마에 적대적이었던 여러 민족들과 함께 연합을 구성하려 했다. 기원전 295년 센티눔 전투에서 로마군에 맞섰던 연합군[40]은 삼니움족, 갈리아족, 에트루리아인, 움브리족 등 다양한 출신의 연합군으로 이뤄졌었다.[41] 로마군이 이 연합군을 상대로 결정적 승리를 거두자, 로마가 이탈리아를 지배하는 것을 더 이상을 막을 수 없음이 확실시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기원전 282년 포풀로니아 전투에서 로마는 이탈리아에 대한 에트루리아의 얼마 안 남은 패권을 끝장내버렸다. 이에 따라 세 번의 삼니움 전쟁 (기원전 343년~341년, 기원전 326년~304년, 기원전 298년~290년)에서 로마의 승리는 중부-남부 이탈리아의 많은 영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해주었고, 라틴 시민권이 적용되는 식민 도시 건설, 로마 식민지 설립, 아피아 가도 건립 등 로마가 시행한 정치적 그리고 국가적 전략 등은 남쪽을 향한 이 팽창주의적 압력의 힘을 보여준다.[42] 영토 지배에 대한 관심은 사실 클라우디우스 씨족을 포함한 일부 귀족 가문들의 단순한 특권이 아닌, 로마의 정치 상황 전반을 포괄한 것이었고, 로마 원로원 전체가 플레브스와 함께 이를 따랐다.[42] 실제로, 남쪽에 대한 팽창은 경제 및 문화적 관심에서 자극된 것으로, 로마의 확장을 막을 수 있는 높은 수준의 군사적, 정치적, 문화적 조직체였던 마그나 그라이키아라는 문명의 존재는 로마의 팽창을 늦추는 데 기여했다.[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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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세기에 제작된 놀라의 무덤 프리즈에 그려진 프레스코 속 삼니움족 보병과 기병

남부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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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가 시작되면서, 로마는 이탈리아반도 내 강국이 되었으나, 아직까지 이 당시 지중해의 주요 강국인 카르타고 및 그리스의 폴리스 등과 마찰이 일어나지는 않았었다. 남부 이탈리아는 여전히 마그나 그라이키아의 수중에 있었으며[44] 이들은 과거 삼니움족과 동맹이었다.[45]

로마와 마그나 그라이키아의 중심 도시들 간의 상업적 관계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으나, 로마와 캄파니아의 그리스 도시들 간 일정한 상업적 이해관계의 공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320년을 시작으로 로마와 캄파니아 지역의 주화들을 통해 확인된다.[46] 이 상업 협정은 삼니움 전쟁과 로마의 남방 확장의 결과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새로운 경작지에 대한 로마의 농촌 인구의 요구 역시도 중부와 북부 이탈리아 팽창에서 충족되지 못한 남쪽으로 영토 팽창의 필요성을 결정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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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피로스 흉상

기원전 280년 피로스의 남부 이탈리아 침공 이후 그리스 식민 도시 일부와 로마의 지배에 반란을 일으켰던 삼니옥족의 일부가 가담하였으며,[47] 로마인들은 몇 차례 전투에서 패배를 겪었다. 피로스는 이탈리아 내에서 활동이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철수하자,[48] 로마는 남부 이탈리아로 재빨리 움직여, 협정과 조약 등으로 마그나 그라이키아를 복속시키고 분열시키며[49] 대부분의 도시들에는 해당 지역에 대한 일종의 간접적 통제가 도입되었다.[50] 제1차 포에니 전쟁 기간 동안에도 그리스 도시들에 대해 중대한 군사적 강제가 이뤄졌다는 증거는 없으며, 전쟁이 시작된 기원전 264년에 나폴리, 타렌툼, 로크리에서 수송선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빌린 것이 유일한 기여였다.[51]

포에니 전쟁 기간 및 이후 정복 (기원전 264년–기원전 13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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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세기 말과 기원전 1세기 초 사이 갈리아 키살피나 영역 (투명한 적색)

이탈리아반도에 대한 사실상의 지배를 이룩한 것과,[52] 강력한 군사적 평판으로,[53] 로마는 이탈리아반도 밖으로 팽창을 팽창을 모색하기 시작할 수 있었다. 북쪽에 있는 알프스산맥을 자연 장벽으로 여겼고 아직까지는 장대한 갈리아 민족들과 충돌하고 싶지 않았기에, 로마에는 시칠리아와 지중해 섬들로 눈길을 돌리며, 과거 동맹이었던 카르타고와의 공개적인 충돌로 이어져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53][54]

갈리아 키살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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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군은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포강을 넘어가 갈리아 키살피나 일부를 정복했다. 기원전 222년 클라스티디움 전투는 로마에 인수브레스족의 수도 '메디올라눔' (밀라노) 점령을 가져다 주었다. 이곳의 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해, 로마는 보이족의 영토에는 피아첸차, 인수브레스족의 영토에는 크레모나 등 식민 도시를 건설했다. 북부 이탈리아의 갈리아인들은 이에 따라 알프스에서 이탈리아로 한니발이 넘어오자 봉기를 일으켰다.

제2차 포에니 전쟁 기간 로마는 또한 갈리아 키살피나의 아펜니노산맥 북쪽 켈트 영토를 복속시켰고 (기원전 222년부터 기원전 200년) 그런 다음에는 인접한 베네티족 (동쪽에 위치)과 리구레스족 (서쪽에 위치)도 복속시켜며 알프스산맥 맨 아래 지역 앞까지 이르렀다.

기원전 200년에 일어난 갈리아인들의 봉기로 피아첸차가 점거되었고 크레모나를 위협하였지만 로마는 무력으로 개입하기로 결정하였다. 기원전 196년에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시피오 나시카는 인수브레스족을 패퇴시켰고, 기원전 191년에는 피아엔차와 리미니 사이 방대한 영토를 지배하던 보이족을 제압시켰다. 포강을 건넌 후 로마의 팽창은 평화적으로 계속되었으며 현지의 민족들인 체코마니족과 베네티족 등은 로마가 다른 인접 부족들의 공격으로 자신들을 막아줄 유일한 세력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기원전 191년경 갈리아 키살피나가 로마에 마침내 점령되었다. 이들의 전진은 북동쪽으로 계속되었고 기원전 191년에 식민 도시아퀼레이아가 세워졌다.[55][56][57] 기원전 177년 이스트리아가, 기원전 175년 리구레스 키살피나 역시도 복속됐다. 불과 몇 십년 만에 폴리비우스는 포 계곡에서 켈트족들이 추방당하거나 제한된 고산지대에 감금당하며 이 지역에서 켈트족들의 쇠락을 몸소 확인할 수 있었다.[58]

마그나 그라이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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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13년경 남부 이탈리아의 한니발 동맹 (파랑)

시칠리아는 제1차 포에니 전쟁 기간 로마에 정복되었다. 시라쿠사만이 기원전 212년까지 독립을 유지하였는데, 시칠리아의 왕 히에론 2세가 롱맹의 동맹으로 헌신한 덕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자 히에로니모스한니발과 동맹을 맺으면서, 로마인들이 시라쿠사를 포위하도록 했고, 기원전 212년에 함락되고 만다.

기원전 218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남부 이탈리아에 대해서 로마의 관심이 부족했고, 이탈리오테스는 이 시기에 로마와 거의 접촉이 없었으며 많은 도시들에 있던 로마 주둔군을 제외하면 로마의 지배는 한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59]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후, 로마는 한니발의 편에 서게 된 결과로 기원전 205년에 로마 공화정으로 합병된 많은 도시들이 있던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 대해서 전례가 없는 행정 개편을 실시하였다.[60] 로마의 식민 도시 (civium romanorum)가 기원전 197년에 시행된 '아티니우스 법'으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영토 통제 계획의 핵심 요소였다. 기원전 194년에 300명으로 이뤄진 로마의 퇴역병 수비대가 볼투르눔, 리테르눔, 푸테올리, 살레르눔, 북센툼, 그리고 아드리아의 시폰툼에 배치되었다. 이 형태는 브레티 (Brettii) 지역에서 재현되었고, 기원전 194년에 크로톤템프사에 로마 식민지가 설립되었고, 이어 기원전 193년에는 코피아, 기원전 192년에는 발렌티아에 라틴 식민지가 세워졌다.[61]

하지만, 기원전 90년/89년의 동맹시 전쟁 기간 시민권의 확대 이후에도 정치적 통일성이 로마화를 의미하지는 않았고 늦어도 아우구스투스 시대까지 정치 및 사회 형태와 로마에서 거리 등에 따라 이 지역 도시들 간 로마화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또한 로마화는 일찍이 완전히 동화가 이뤄진 쿠마에 (기원전 338년에 그리스 도시로서 유일하게 'civitas sine suffragio'를 부여받은 곳)와 파에스툼부터 그리스어와 문화를 유지하던 나폴리레기움까지 로마가 각 도시를 어떻게 다르게 대우했는지에 따른 중대한 차이들에 의존했다.[62]

그 외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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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과 남쪽에 있는 여러 부족 집단들은 강제로 자신들의 고향 땅을 떠나 이주당하였다.[63] 예시로 리구리아의 아푸아니족은 산니오와 캄파니아로 대량 (47,000명)으로 추방을 당했다. 이탈리아반도의 로마화와 균일화의 과정은 이 시점에서 결실을 낳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남쪽의 이탈리아의 귀족 계층들 같은 경우 반도 전역에 걸친 혈연적 유대를 형성하고자 로마 및 에트루리아 귀족 간의 통혼을 하기 시작했다. 이는 몹시 성공적이어서 기원전 1세기를 시작으로 다수의 유력한 정치 인사들은 자신들의 선조들 중에 에트루리아, 삼니움, 움브리아 계통 가문을 두고 있었다.[64]

동맹시 전쟁과 로마 시민권 요구 (기원전 133년–기원전 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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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외젠 기욤이 제작한 그라쿠스 형제 조각상으로, 현재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위치. 그라쿠스 형제가 ‘재산’이라 적힌 문서에 손을 대고 있는 모습은, 그들의 삶을 바라보던 당대의 해석과 부합한다.[65]

그라쿠스 형제의 소요 (기원전 133년–기원전 121년)부터 술라의 집권 (기원전 82년-기원전 78년)까지 이 시기는 약 한 세기 뒤 귀족 공화정을 종식시키게 되는 위기의 시작을 이룬 시점이었다. 역사가 로널드 사임은 공화정에서 아우구스투스원수정으로 전환된 시기를 '로마 혁명'이라 칭했다.[66]

로마 공화정의 지중해 지역으로 빠른 확장은 커다란 문제를 낳았으며, 당시 로마의 행정 기구들은 작은 국가를 관리하기 위해 맞춰진 것이었으나, 이제 국가는 이베리아부터 아프리카, 그리스, 소아시아 등까지 걸쳐 있었다. 기원전 133년에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이탈리아 여러 곳에서 인력 부족과 만연한 빈곤 등을 염려했었다. 그는 이러한 상태에서 군대의 중추였던 사회질서가 유지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에 따라 그는 잉여 토지를 재정적으로 충분치 않은 시민들에게 분배하여 계속된 전쟁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던 소규모 자작농 계층에 새로운 동력을 부여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대지주의 반대에 직면하는데, 이들은 채무자들을 축출하거나 그들의 땅의 땅을 사들이며 소유지를 늘렸다.[67] 본토 및 해외에서 지속된 전쟁은 소지주들로 하여금 군단에 복무하면서 많은 세월 동안 방치하도록 했으나 이들은 로마에 (약탈과 정복을 통해) 저렴한 값으로 뛰어난 품질의 상품과 노예를 공급하였으며,[68] 이때 노예들은 부유한 자들의 농장에 항상 일하며 로마의 사회 조직에 커다란 결과를 낳았는데, 소규모 토지는 낮은 운영비를 바탕으로 한 노예 대농장과 경쟁할 수 없었다. 빚 때문에 농촌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들 소규모 지주들은 모두 로마로 유입되어, 그곳에서 도시 하층민을 형성했으며 일자리, 거처, 먹을 음식도 없는 대중이 형성되었고, 그 결과 이탈리아 세계 전반에 걸쳐 불가피하면서도 위험한 사회적 긴장이 초래되었다.

이 사건들 이후, 로마 시대 이탈리아는 킴브리 전쟁 (기원전 113년–기원전 101년)의 영향을 받게 된다. 북유럽에서 온 게르만 부족들인 킴브리족튜턴족 등이 로마의 북쪽 영토로 이주하였고,[69] 로마 및 로마의 동맹들과 분쟁에 흽싸였다.[70] 이는 기원전 390년 갈리아인들의 침공 및 '한니발 전쟁' 등 역사를 고려할 때 우려할 만한 일이었고, 이탈리아 및 로마 그 자체한테도 심각한 위험으로 느꼈다.[70] 기원전 105년 로마인들은 알프스 너머 갈리아 남부의 오랑주 인근에서 벌어진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이들이 겪은 최악의 패배 중 하나를 맛봤으며 칸나이 전투에서 겪은 패배와 거의 비슷할 정도의 엄청난 패배였다. 킴브리족이 로마인들과 휴전을 체결하고 이베리아를 약탈하는 데 집중하면서, 로마는 게르만족과의 최후의 전투를 위해 치밀하게 준비를 할 수 있었고, 처음에는 아콰이 섹스티아이 전투 (엑상프로방스) 그 다음에는 이탈리아 땅에서 벌어진 베르켈라이 전투에서 게르만족을 전멸시켜냈다.[69] 게르만 부족들은 패배하여 노예가 되었고 (포로가 최소한 140,000명) 이들의 위협은 사라졌다.[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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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시 전쟁 (기원전 91년~기원전88년까지) 기원전 100년 당시 로마 동맹시 연맹의 지도.
  로마 영토
  라틴 식민 도시
  로마의 동맹시 (이탈리아 동맹시)

기원전 2세기 중엽에 들어 로마 시민권이 없는 이탈리아족 (이탈리아 동맹시)은 시민권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기원전 89년에 힘겹고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치르고 나서야 이를 얻게 되었다. 이 순간은 이탈리아가 로마 세계에 통합되는 과정에서의 마지막이자 결정적인 단계였으며, 이에 따라 다양한 민족 문화가 단일한 정치와 문화적 정체성으로 융합되는 결과를 낳았다. 시민권이 없는 이탈리아족은 로마에 맞서 연대하였으며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심지어 "이탈리아 전역이 로마에 맞서 들고 일어났다"라고 기록했다[72]), 비록 이탈리아 연합은 전쟁에 패했으나, 갈망하던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기는 했다.[73] 이 '거대한 전쟁'(디오도로스 시켈로스[74]가 명명) 이 종전되고 나서 이탈리아와 속주 간의 차이점이 더욱 분명해졌다.

이 모든 사건들과 동시에, 기원전 135년부터 기원전 71년까지,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본토에서 노예들의 봉기가 발생하며, 노예들이 로마 국가에 맞섰다. 제3차 봉기가 가장 심각했었다.[75] 봉기 가담자들의 수에 대한 추정 치에서는 120,000명 또는 150,000명으로 몹시 많은 자들이 개입하였다고 했다.[76] 이 최후의 봉기 당시, 반란군을 이끌던 스파르타쿠스검투사로 훈련된 자이었다. 기원전 73년에, 일부 동료와 함께 그는 카푸아에서 반란을 일으켜 베수비오산으로 달아났다. 반란군의 수는 70,0000명으로 빠르게 불어났으며, 주로 트라키아인, 갈리아인, 게르만 노예들로 이뤄졌다. 처음에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부지휘관 크릭수스는 자신들을 제압하도록 보내진 군단 몇 개를 가까스로 격파시켜냈다. 여섯 개 군단을 가지고 있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에게 단일 지휘권이 확립되자, 노예 반란은 기원전 71년에 진압되었다. 약 노예 10,000명이 전장에서 도망쳤다. 이 달아나던 노예들은 스페인에서 돌아오던 폼페이우스에게 가로막히고 마는데, 그는 해적들의 도움을 받았으며, 이 해적들은 처음에 노예들을 시칠리아로 운송해주기로 약속했으나 로마와의 협정으로 배신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후퇴하던 병력 중 6,000명이 카푸아에서 로마까지 아피아 가도를 따라 십자가형에 쳐했다.[77]

많은 역사가들은 대개 이탈리아 땅에서 벌어진 로마의 내전들이 로마의 정치 기구들의 쇠퇴라는 긴 과정의 필연적 결과라는 것에 동의하고 있으며,[78] 이는 기원전 133년과 121년에 그라쿠스 형제의 살해로 시작되었고, 최초로 여러 임시 공직들을 맡으며 쇠퇴해 가던 공화정에서 독재관이 되고 싶어하는 자들이 따를 예시를 제시한 가이우스 마리우스군단 개혁으로 이어졌으며, 동맹시 전쟁, 재임 기간 숙청으로 유명한 술라독재정 수립으로 종결된 마리우스와 술라 세력간 충돌 등이 있었으며, 최종적으로 제1차 삼두정치이 성립되었다.[79] 이 연속의 사건들은 공화정의 토대를 산산조각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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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스쿨룸 초상카이사르가 살아있던 시절에 만들어져 현재까지 남아있는 카이사르의 유일한 조각상이며, 현재 이탈리아 토리노고고학 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원로원과 격렬한 논쟁 끝에, 카이사르는 갈리아 키살피나와 이탈리아 지역 사이의 경계를 나타내는 루비콘강을 무장한 채로 건넜으며[80] 한편 원로원은 공화주의 정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하여 폼페이우스를 중심으로 모였고 카이사르에 전쟁을 선포하기로 하였다 (기원전 49년). 같은 해, 시민권은 '로스키우스 법'을 통해 키살피나 지역의 갈리아인들과 베네티인들로도 확장되면서, 오랜 기간 염원한 이탈리아반도 전역의 사회적 통합이 완수되었고, 모든 이탈리아족들은 모든 면에서 보았을 때 사실상의 로마인이 되었다.[81]

한편, 우여곡절 끝에, 카이사르파와 폼페이우스파는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마주하게 되고, 카이사르는 경쟁자에게 회복할 수 없는 패배를 가져다주었다. 그 후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망명을 가나,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기원전 48년). 카이사르는 역시도 이집트를 갔으나,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사이 벌어진 왕실 분쟁에 연루되고 말았다. 이 상황이 해결되자, 그는 전쟁을 재개하여, 젤라 전투에서 폰토스의 왕 파르나케스 2세를 패배시킨다 (기원전 47년). 그런 다음 그는 폼페이우스파들이 카토의 지휘 하에서 재건을 이루고 있던 아프리카로 떠나, 탑수스 전투에서 이들을 제압시켰다 (기원전 46년). 생존자들은 스페인에서 피난처를 구하려 했으나, 카이사르가 그곳으로 이들을 문다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격퇴시켰다 (기원전 45년).

카이사르는 3월 이데스에 벌어진 사건으로 사망했고 (기원전 44년) 그의 조카 옥타비아누스가 그의 주요 후계자가 되었다. 종조부의 살해 소식을 알게 되자, 그는 양자로서 본인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로마로 돌아오기로 결정했고, 뿐만 아니라 유일한 장자로서 죽은 카이사르의 이름를 갖고 있어, 이에 따라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우스가 되었다. 카이사르는 또한 로마의 거주민들마다 각 300 세스테르티우스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테베레강의 연안을 따라 있는 그의 정원들도 기부하였다 (Horti Caesaris).[82] 브린디시에 상륙한,[83] 옥타비아누스는 5월 21일에 로마에 도착하였는데, 카이사르 암살자들은 한달도 더 전에 이미 도시를 떠난 이후였다. 옥타비아누스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고 하는 양부의 이름을 계승한 명칭을 주장하기를 서둘렀고, 대대적으로 본인이 양부의 유산을 상속했음을 선언하면서 가문의 재산에 대한 인도를 요구했다. 원로원, 그리고 특히 키케로 등은 이 시점에서 그가 젊은 나이였던 점을 고려할 때 그를 미숙한 정치 초보자 및[84] 원로원 귀족층에 의해 조종당하기 쉬운 자로 보았고, 안토니우스의 지위가 약해지고 있음을 판단한 이들은 유언의 비준을 승인하였다. 카이사르의 유산을 이제 처분할 수 있게 된 옥타비아누스는 약 3,000명의 고참병으로 이루어진 사병을 모집할 수 있었던 반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맡겨져 있던 갈리아 키살피나 관할권을 부여받은 뒤, 카이사르 암살자들과의 전쟁을 준비하며 카이사르파의 환심을 되찾고자 하였다. 이 시기에 키케로는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서신을 보내며, 옥타비아누스가 공화정의 대의에 충실할 것이라는 확신과, 또한 이 젊은 가문의 후예가 지닌 잠재력을 활용해 안토니우스를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드러냈는데,[85]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이 벌어진 시기에 아무 탈 없이 살아남았다 (이는 키케로에게 깊은 실망을 가져다 주었다).[86]

한편 새로운 내전이 진행되던 와중, 카이사르가 사망한 지 2년 만에 (기원전 42년),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가 폐지되고 알프스 이남의 모든 영역이 이탈리아 행정 구역로 합병되면서, 이탈리아의 일부가 되었으며, 심지어 이 지역의 도시들은 7년 전부터 카이사르한테서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기도 했었다.[81]

필리피 전투 (기원전 42년)부터 아우구스투스의 행정 개편 (서기 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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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 또는 '아우구스투스 이오리카토'로 알려진 아우구스투스 조각상. 아우구스투스는 이탈리아를 최초로 11개 구역 (regiones)으로 재편성하였다.[87]

필리피 전투 (기원전 42년)에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승전 이후, 이 둘 간의 새로운 불화가 생겨났다. 기원전 41년에 안토니우스의 형제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이탈리아 내 토지를 안토니우스의 고참병들에게 분배하라고 요구하자 (이 외에도 옥타비아누스의 고참병들에게도 배분) 그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나 기원전 40년 페루자에서 제압당하고 말았다. 수에토니우스는 페루자 공방전 기간에, 옥타비아누스가 도시의 성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의식을 치르고 있는 도중 페루자에서 온 검투사 무리에게 거의 죽을뻔 했다고 기록하였다.[88]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패배한 뒤,[88]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이 사건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89] 그러다 마침내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병사들이 싸우기를 거부하면서 삼두정치가들은 서로에 대한 투쟁을 멈추었다. 브린디시 조약 (기원전 40년 9월)으로, 속주들의 새로운 분할이 이뤄졌으며, 안토니우스에게는 스쿠타리부터 마케도니아, 아카이아 등을 포함한 로마의 동방 지역을, 일리리쿰을 포함한 서방은 옥타비아누스에게, 권력 다툼에서 탈락한 레피두스아프리카누미디아를, 그리고 서방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조용히 시키기 위해 시칠리아를 그에게 귀속되는 것을 확인해주었다.[89] 이 조약은 아내였던 풀바가 최근에 사망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인 소 옥타비아 간의 혼인으로 발효되었다.

기원전 38년, 옥타비아누스는 앞으로 5년간 지속될 동맹 협정을 이어나가기 위해 브린디시에서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를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기원전 36년에 그의 친우이자 군 지휘관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로 인해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안토니우스가 보낸 지원군 덕에 폼페이우스는 또한 나울로코스 전투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90] 시칠리아는 점령당하고 말았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동방으로 달아났으나, 얼마 못 가 안토니우스가 보낸 암살자들에게 암살당하고 만다.[89] 하지만 이 시점에서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의 야망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는 시칠리아가 자신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동맹 협정을 깨고 20개 군단으로 점령에 나섰다. 하지만 그의 병사들이 옥타비아누스의 편에 서면서 레피두스는 빠르게 패퇴하게 되었고 '폰티펙스 막시무스'라는 대외적 지위를 유지하는 한편 키르케오에 감금되었다.[90]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부터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그리고 레피두스까지 지난 6년간 모든 경쟁자들을 점진적으로 제거하고 나자, 서방은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동방에서는 안토니우스의 손아귀에 놓이는 상황에 되면서, 두 삼두정치자 사이의 대립은 불가피하게 심화되었다. 분쟁은 이제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전쟁 명분(casus belli)뿐이었으며,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안토니우스의 유언에서 찾아냈는데, 그 유언에서 로마의 동방 영토들을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및 카이사르의 아들 카이사리온을 포함한 그녀의 자녀들에게 남긴다는 것이 기록된 것이었다.[91] 이후, 기원전 32년에 안토니우스가 공공의 적으로 선포되자, 로마 원로원은 기원전 32년에 프톨레마이오스조 이집트의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 전쟁을 선포하였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하면서 다음 해 이집트에서 이 둘은 자결을 했다.[91][92]

사실상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국가의 절대적인 지배자가 되었지만, 형식상으로는 로마는 여전히 공화정이었고, 옥타비아누스 자신도 삼두정치자로서의 포테스타스(potestas)가 한 차례도 갱신된 적이 없었기 아직 어떠한 공식적 권한도 부여받지 못한 상태였다.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에서는 "potitus rerum omnium per consensum universorum"(보편적 합의)에 의해 최근 몇 년간을 통치했다고 하며, 이에 대해 일종의 종신적 tribunicia potestas를 부여받았다고 하였다[93](분명히 초헌법적 사실이었다).[94] 이러한 합의가 군대의 충성스러운 지지를 계속 포함하고 있는 한, 옥타비아누스는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으며, 그의 승리는 사실상 이탈리아가 근동에 대해 거둔 승리를 의미했고, 로마 제국이 그 균형과 중심을 로마 이외의 다른 곳에서 결코 찾을 수 없게 되었음을 보증하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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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시대 이탈리아 지방 (서기 7년)

내전의 시대가 종료되면서,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16년부터 기원전 7년에 걸쳐 알프스 계곡 (아오스타 계곡에서부터 이스트리아아르시아강) 정복에 착수하며 이탈리아라고 하는 지리학적 지역의 정복을 완수하였다. 알프스 산악지대 전체 정복 이후, 이곳을 이탈리아 전역과 더불어 그는 이탈리아를 11개 지역으로 나누고 새로운 중심지를 이곳에 더하여 확대시켰다 (약 서기 7년).[95] 해당 지역들은 다음과 같았다:

수에토니우스와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에서는 많으면 28개의 식민 도시 건설을 전하고 있다.[96] 이는 특정한 방식에서 이러한 식민 도시들의 중요성을 인정한 조치로서, 로마와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고, 식민 도시의 데쿠리온들이 자기 도시에서 로마의 정무관 선출을 위한 투표를 허용하였으며, 선출 당일 그 투표 결과를 로마로 송부하도록 하였다.[96]

아우구스투스는 이탈리아반도의 패권적 지위와 관련된 로마와 이탈리아적 전통을 강화하였다. 1세기 내내, 이탈리아는 'Solum provinciale'와 이탈리아 땅을 구분하는 'Ius Italicum' 덕에 필적할 데 없는 위신, 강력한 경제 및 사법적 특권 등을 누렸고, 지중해내에서 군사적 그리고 경제적 분야에서 지배적 위치에 있었다. 이탈리아가 누린 특권 가운데에는 조밀한 도로망의 구축, 다양한 공공 시설 (포룸, 신전, 원형극장, 극장, 욕장)을 설치하여 도시 경관을 꾸미는 것[97]과 세금 징수 기구[96] 등이 있었다

평화 시에 이탈리아 내에서는 로마의 정무관들이 imperium militiae (군사권) 대신 imperium domi(경찰권)을 행사하였다. 속주와는 달리, 이탈리아의 거주민들은 라틴 시민권과 조세 특권을 누렸고 이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까지 유지되었다.[98]

각주

[편집]
  1. Sicilian Peoples: The Carthaginians. 2022년 2월 9일에 확인함.
  2. Giacomo Devoto, Gli antichi Italici, Firenze, Vallecchi, 1931.
  3. Pennell 1890, chpt. 3, par. 8
  4. Grant 1993, 23쪽
  5. Pennell 1890, chpt. 9, par. 3
  6. 1 2 Pennell 1890, chpt. 5, par. 1
  7. Grant 1993, 21쪽
  8. 리비우스 '로마 건국사', I, 9.
  9. 리비우스 '로마 건국사', I, 42.
  10. 에우트로피우스 Breviarium ab Urbe condita, I, 7.
  11. 리비우스 '로마 건국사', 1.19.
  12. 리비우스 '로마 건국사', 1.37.
  13. Fasti Triumphales
  14. 스트라본 Geographica, V, 3.4.
  15. 1 2 3 에우트로피우스, Breviarium ab Urbe condita, I, 8.
  16. 리비우스 '로마 건국사', 1.25 and 1.44.
  17. Grant 1993, 31쪽
  18. Pennell 1890, chpt. 6, par. 1
  19. Grant 1993, 38쪽
  20. Grant 1993, 37쪽
  21. 1 2 Matyszak 2004, 13쪽
  22. Grant 1993, 39쪽
  23. 리비우스 '로마 건국사', II, 26
  24. Grant 1993, 41쪽
  25. Grant 1993, 42쪽
  26. Pennell 1890, chpt. 2
  27. 1 2 3 4 5 6 Grant 1993, 44쪽
  28. 1 2 Pennell 1890, chpt. 9, par. 2
  29. 리비우스 '로마 건국사', V, 48
  30. Lane Fox 2005, 283쪽
  31. Pennell 1890, chpt. 9, par. 4
  32. Pennell 1890, chpt. 9, par. 23
  33. Lane Fox 2005, 282쪽
  34. Pennell 1890, chpt. 9, par. 8
  35. Grant 1993, 48쪽
  36. 1 2 Pennell 1890, chpt. 9, par. 13
  37. Grant 1993, 49쪽
  38. Pennell 1890, chpt. 9, par. 14
  39. 1 2 3 Grant 1993, 52쪽
  40. 1 2 Lane Fox 2005, 290쪽
  41. Grant 1993, 53쪽
  42. 1 2 Musti 1990, 533쪽
  43. Musti 1990, 534쪽
  44. Grant 1993, 77쪽
  45. Matyszak 2004, 14쪽
  46. Musti 1990, 535쪽
  47. Grant 1993, 78쪽
  48. 카시우스 디오, Roman History, I, 7.3.
  49. DMITRIEV, S. (2017). The Status of Greek Cities in Roman Reception and Adaptation. Hermes, 145(2), 195–209. http://www.jstor.org/stable/26650396
  50. Lane Fox 2005, 307쪽
  51. Polybius 1.20.14
  52. Pennell 1890, chpt. 11, par. 1
  53. 1 2 Grant 1993, 80쪽
  54. Matyszak 2004, 16쪽
  55.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Historiae Romanae ad M. Vinicium consulem libri duo, I, 13.2.
  56. 대 플리니우스 '박물지, III, 126-127.
  57. 리비우스 '아브 우르베 콘디타', XL, 34.2-3.
  58. 폴리비우스 Histories, II, 35.4.
  59. Kathryn Lomas, Aspects of the Relationship between Rome and the Greek Cities of Southern Italy and Campania during the Republic and Early Empire, Thesis L3473, Newcastle University, 1989 http://theses.ncl.ac.uk/jspui/handle/10443/744
  60. Le arti di Efesto. Capolavori in metallo (이탈리아어). 11쪽. 2023년 7월 12일에 확인함.
  61. Giuseppe Celsi, La colonia romana di Croto e la statio di Lacenium, Gruppo Archeologico Krotoniate (GAK) https://www.gruppoarcheologicokr.it/la-colonia-romana-di-croto/
  62. Kathryn Lomas, Aspects of the Relationship between Rome and the Greek Cities of Southern Italy and Campania during the Republic and Early Empire, Thesis L3473, Newcastle University, 1989 http://theses.ncl.ac.uk/jspui/handle/10443/744 P. 8
  63. Robson 1934, 599–608쪽
  64. David 2002, 43쪽
  65. Sturgis, Russell (1904). The appreciation of sculpture: a handbook. New York: Baker. 146쪽.
  66. Ruffolo 2004, 72쪽
  67. Ruffolo 2004, 18쪽
  68. Ruffolo 2004, 17쪽
  69. 1 2 Matyszak 2004, 75쪽
  70. 1 2 Santosuosso 2001, 6쪽
  71. Le Glay, Voisin & Le Bohec 2002, 111쪽
  72.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Historiae Romanae ad M. Vinicium consulem libri duo, II, 15.
  73. 스트라본 'Geographica', V, 1.1.
  74.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비블리오테카 히스토리카', XXXVII, 1.
  75. Matyszak 2004, 77쪽
  76. Santosuosso 2001, 43쪽
  77. Matyszak 2004, 133쪽
  78. Sheppard & Hook 2010, 8쪽
  79. Sheppard & Hook 2010, 9–10쪽
  80. Sheppard & Hook 2010, 16쪽
  81. 1 2 Laffi 1992, 5–23쪽
  82.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카이사르', 68.
  83.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아우구스투스', 10.
  84. 키케로 '필리포스 연설', XIII.
  85. 키케로 '아티쿠스에게 보내는 서한', XV, 12.2.
  86. Canfora 2007, 7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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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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