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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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역사는 1815년 나폴레옹이 패배한 이후 수립된 네덜란드 왕국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천 년 동안 인류는 북해 연안의 강 하구 지대에 정착하여 살아왔다. 문헌 기록에서는 로마 제국의 군사적 변경 지대였던 약 4세기 즈음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서로마 제국이 붕괴되고 중세가 시작되며, 이 지역에는 3개의 주요 게르만족 집단이 형성되었다. 북부와 해안 지역에는 프리슬란트인, 북동부에는 저지 작센인, 그리고 남부에는 프랑크인이 자리잡았다. 800년경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왕조는 서유럽의 상당 부분을 포괄하는 제국을 재건하며 이 지역을 다시 통합했다. 이후 이 지역은 신성로마제국 내의 하로타링기아 공국에 속하게 되었으나, 제국이나 공국 어느 쪽도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이루지는 못했다. 중세 내내 브라반트, 홀란트, 제일란트, 프리슬란트, 헬데를란트 등과 같은 여러 영주령이 서로 얽힌 구성을 이루며 존속했다.
1433년에 이르러 부르고뉴 공작은 하로타링기아 대부분을 장악해 부르고뉴령 네덜란드를 형성했다. 이는 오늘날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프랑스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이후 그 계승자인 스페인의 가톨릭 군주가 개신교에 대한 탄압 정책을 시행하자, 이에 반발한 네덜란드 지역에서는 반란이 일어났고, 그 결과 1581년 네덜란드는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남부의 '스페인령 네덜란드'는 대체로 오늘날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에 해당하며, 북부의 '연합주(혹은 네덜란드 공화국)'는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지역으로서 주로 개신교를 신봉했고, 현대 네덜란드의 전신이 되었다.
네덜란드 황금시대는 대략 1667년을 정점으로 하여 무역과 산업,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한 시기였다. 네덜란드 공화국은 종교적 관용을 실천했으며, 그 결과 포르투갈계 유대인이 암스테르담으로 유입되어 신앙 활동을 지속하는 한편 상업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1][2] 아시아와 아메리카에 걸쳐 네덜란드의 세계 제국이 형성되었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침략과 식민지배, 외부 자원 수탈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종교 선교를 목적으로 하지 않은, 당대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국영 상업회사 중 하나로 성장했다. 하지만 18세기에 접어들면서 네덜란드의 권력, 부, 국제적 영향력은 점차 쇠퇴했다. 보다 강력한 이웃 국가였던 영국과 프랑스와 치른 여러 전쟁은 국가의 역량은 크게 약해졌다. 영국은 북아메리카의 식민지였던 니우암스테르담을 점령하고 '뉴욕'으로 개칭했다. 국내적으로는 오라녜파와 애국파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었고, 1789년 이후 프랑스 혁명의 영향이 퍼진 뒤, 1795년 친프랑스 성향의 바타비아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이를 1806년부터 1810년까지 위성국인 홀란트 왕국으로 만들었고, 이어서 프랑스 제국에 직접 병합했다.
1813~1815년 나폴레옹이 패배한 이후, 오라녜 가문을 군주로 하여 영토적으로 확대된 '네덜란드 연합 왕국'이 수립되었으며, 이 국가는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함께 통치했다. 하지만 국왕이 벨기에에 대해 인기가 없는 개신교 중심 개혁을 강행하자, 1830년 벨기에는 네덜란드에서 이탈했고, 1839년에 새로운 국경이 확정되었다. 초기에는 보수적인 정치 체제가 유지되었고, 1849년 헌법 제정 후 네덜란드는 입헌군주제를 기반으로 한 의회민주주의 국가로 전환되었다. 오늘날의 룩셈부르크는 1839년 공식적으로 네덜란드로부터 분리되었으나, 두 나라의 동군연합은 1890년까지 지속되었다가, 이후에는 같은 왕조의 다른 분가에 의해 통치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네덜란드는 중립을 유지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의 침공을 받아 점령되었다. 나치는 협력자들과 함께 네덜란드 내 유대인 인구 거의 전부를 체포하고 학살했다. 이후 네덜란드 레지스탕스가 확대되자, 나치는 보복으로 식량 공급을 차단했고, 그 결과 1944~1945년 겨울에 심각한 기근이 발생했다. 1942년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가 일본에 의해 점령되었고, 그에 앞서 네덜란드 측은 일본이 절실히 필요로 하던 유전을 파괴했다. 1945년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선언했고, 이어서 1975년에는 수리남이 독립했다. 전후 네덜란드는 미국의 마셜 플랜의 지원을 받아 빠른 경제 회복을 이루었으며, 이후 평화와 번영의 시기에 복지국가를 구축했다. 네덜란드는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함께 베네룩스 경제 연합을 결성했고, 3개 국가는 모두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창립 회원국이 되었다. 최근 수십 년간 네덜란드 경제는 독일 경제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높은 번영을 누려 왔고, 2002년 1월 1일에는 다른 8개 EU 회원국과 함께 유로화를 공식 통화로 채택했다.
선사 (~BCE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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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빙하기 당시 네덜란드 지역은 툰드라 기후였으며, 식생이 매우 빈약했다. 이 시기 주민들은 수렵, 채집 생활을 영위하며 생존했다. 기원전 5,600년경에 등장한[3] 스비프터반트(Swifterbant) 문화는 강과 밀접하게 연관된 수렵, 채집 집단으로, 스칸디나비아 남부의 에르테뵐레 문화와 연관성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약 5천 년경, 중부 유럽 계통의 농경민이자 지중해 계통을 지닌 선형 토기 문화가 네덜란드 인근 지역에 도달하며 농경이 도입되었다. 이들의 정착지는 주로 림뷔르흐 남부에 한정되었고, 지속적인 정착은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연안 지역의 스비프터반트인들이 토기 제작과 목축을 받아들였다는 증거가 일부 존재한다. 지역 집단들은 기원전 4,800년에서 4,500년 사이에 점차 목축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4][5][6] 기원전 약 4천 경에는 깔때기형 토기 문화가 등장하여 농경을 이 지역에 본격적으로 정착시켰다. 이 문화는 덴마크에서 북독일을 거쳐 네덜란드 북부까지 확산되었다. 한편, 연안 지역에서는 플라르딩언 문화가 수렵 및 채집 전통을 계속 유지했다.
기원전 약 2,950년, 깔때기형 토기 문화는 북유럽과 중부 유럽 전역에 걸쳐 확산된 끈무늬토기 문화로 이행했다. 이 문화의 확산은 우크라이나 방면에서 이동해 온 인구 집단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지며, 이들은 인도유럽어족 언어와 함께 청동기 기술을 전파한 것으로 이해된다. 가장 이른 시기의 청동 도구는 바헤닝언에서 발견된 보물 매장지에서 출토되었으며, 이는 청동기 시대 금속 장인의 무덤으로 해석된다.[7] 북부 지역에서는 엘프(Elp) 문화가,[8] 남부 지역에서는 힐베르쉼 문화가 각각 전개되었는데, 특히 힐베르쉼 문화는 브리튼 제도와의 문화적 연관성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9]
철기시대에 이르러 오늘날 네덜란드 지역의 주민들은 일정한 수준의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철광석이 전국적으로 분포해 있었기 때문에, 대장장이들은 소규모 취락을 순회하며 도끼, 칼, 핀, 화살촉, 검 등 다양한 철제, 청동제 도구를 제작했다. 대형 무덤인 포르스텐흐라프(Vorstengraf)에서는 굽은 형태의 철검을 포함한 여러 유물이 출토되었다. 로마인이 등장하기 전까지 북부 지역에서 하르프스테트(Harpstedt) 문화가 등장했는데, 기후 악화로 인해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집단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10][11][12] 이후 이들은 두 갈래로 분화되었는데, 하나는 훗날 초기 프리슬란트인과 초기 작센인으로 발전한 북부 집단이며,[12] 다른 하나는 라인강 유역으로 확정되어 궁극적으로 살리족 프랑크인으로 발전한 남부 집단이다.[12] 한편 더 남쪽에서는 할슈타트 문화의 영향을 받은 집단이 존재했다. 이들은 점차 켈트계 라텐(La Tène) 문화로 흡수되거나 혼합되었다.[13] 이러한 전개는 카이사르가 라인 강을 켈트족과 게르만족을 가르는 경계로 묘사한 기록과도 부합한다. 일부 연구자들[14]은 솜강에서 베저강에 이르는 지역에, 켈트어도 게르만어도 아닌 독자적인 언어와 정체성을 지닌 집단, 소위 '노르트베스트블록(Nordwestblock)'이 존재했으며, 이들이 로마시대 전까지 존속하다가 점차 켈트 및 게르만 집단에 흡수되었다고 보기도 한다.[15][16]
로마 시기 (BC 57 ~ AD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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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을 통해 갈리아 전역을 로마의 지배 아래 두었으며, 이 과정에는 라인강 남쪽의 네덜란드 지역도 포함되었다. 그는 자신의 저작 『갈리아전기』에서 이 지역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남겼다. 카이사르는 강 하구 지역에 메나피족(Menapii)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그 남동쪽에는 오늘날 림뷔르흐에 해당하는 지역에 에부로네스족(Eburones)이 살고 있었다고 서술했다. 그는 라인강과 발강 사이의 땅을 '바타비인의 섬(insula batavorum)'이라 불렀다. 또 라인강을 갈리아인과 그 건너편의 게르만인을 가르는 자연적 경계로 묘사했으나, 동시에 에부로네스족처럼 강 건너편 주민들과 혈연적, 문화적 연관을 지닌 집단도 존재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후 타키투스와 플리니우스 같은 로마 저술가들은 라인강 북쪽 지역에 프리시족(Frisii), 카마비족(Chamavi), 투반테스족(Tubantes)이 거주했다고 기록했다. 강 삼각주 내에는 카나네파테스족(Cananefates), 바타비족(Batavii), 스투리족(Sturii), 마르사키족(Marsacii), 프리시아보네스족(Frisiavones)이 살고 있었으며, 삼각주 남쪽에는 텍수안드리족(Texuandri), 바이타시족(Baetasii), 퉁그리족(Tungri)이 거주하고 있었다.
로마의 지배는 이후 네덜란드가 될 지역에 약 450년에 걸쳐 심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라인강은 군사적으로 요새화된 국경선이 되었으며, 빈번한 무력 충돌로 인해 지속적인 불안정 상태에 놓여 있었다. 로마는 이 지역 양측에서 병력을 모집했고, 이 지역의 부족들은 로마군 내에서 특히 기병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17] 국경 지대의 문화는 로마적, 게르만적, 갈리아적 요소가 혼합된 형태로 전개되었으며, 갈리아 정복 이후 상업 활동 역시 크게 활성화되었다. 하지만 로마 통치에 대한 불만도 지속되었는데, 특히 바타비족의 젊은이들이 강제로 징집되거나 노예로 끌려간 일은 큰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서기 69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키빌리스(Gaius Julius Civilis)가 주도한 바타비아 반란이 발생했다. 이 봉기 과정에서 여러 로마 요새가 불타고, 로마군 북부 군대 일부가 이탈했다. 결국 서기 70년,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Quintus Petillius Cerialis)가 이끄는 로마 군단에 의해 반란은 진압되었다.
17~18세기 작가들은 바타비아인을 네덜란드의 '진정한' 조상으로 간주했고, 이러한 인식은 1619년 자카르타의 식민지가 '바타비아'로 명명되고, 1795년 '바타비아 공화국'이라는 국명이 사용되는 데에도 반영되었다. 오늘날에도 '바타비아인'이라는 표현은 프랑스를 '갈리아'라고 가리키는 것과 유사하게, 네덜란드를 지칭하는 데 간혹 사용된다.[18] 한편 3세기 전반, 라인강 중하류 지역에서는 프랑크인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되었는데,[19] 이는 바타비아 반란의 잔당을 포함한 여러 게르만계 소집단들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연합체였다. 한편 프리시족은 296년경을 마지막으로 문헌 기록에서 사라지는데,[20] 이는 로마 제국 통치 아래에서 다른 지역으로 재정착되었거나,[21] 혹은 해안 지역의 침수로 거주지를 상실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21][22][23]
중세 초 (411 ~ 1000)
[편집]프리슬란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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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가 좋아지면서 동쪽으로부터 게르만계 집단의 또 다른 대규모 이동이 일어났는데, 이는 이른바 '민족 대이동기'라고 알려져 있다. 이 시기 북부 네덜란드에는 주로 작센인을 중심으로, 앵글족과 유트족을 포함한 새로운 이주민들이 유입되었다. 이들 가운데 다수는 네덜란드 북부에 정착하지 않고 브리튼 섬으로 이동했고, 오늘날 앵글로색슨족이라 알려져 있다. 하지만 네덜란드 북부에 남은 이주민들은 점차 '프리슬란트인'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고대 프리시인의 직계 후손은 아니었다. 이 새로운 프리슬란트인들은 북부 네덜란드에 정착해 현대 프리슬란트인의 선조가 되었다.[24][25] 초기 프리슬란트인과 앵글로색슨인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부족 연합에서 태어났기에, 그 언어 역시 매우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고대 프리슬란트어는 고대 영어와 가장 가까운 언어이고,[26] 현대 프리슬란트 방언 역시 현대 영어와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다. 6세기 말에 이르러 프리슬란트인의 거주지는 북쪽으로 북해 연안까지, 7세기에는 남쪽의 도레스타트(Dorestad)까지 확장되었다. 이 시기 네덜란드 북부의 대부분은 프리슬란트라고 알려졌고, 이 광범위한 영역은 때로 '대프리슬란트(Frisia Magna)'라고 불리었다.

7~8세기 프랑크 연대기들은 이 지역을 '프리슬란트 왕국'이라 언급하고 있다. 이 왕국은 네덜란드 해안 지역과 독일 북해 연안을 포괄하는 영역이었다. 이 시기 동안 프리슬란트어는 북해 남안 전역에서 사용되었다. 7세기 프리슬란트 왕국(약 650~734년)은 알데히셀(Aldegisel) 왕과 레드바드(Redbad) 왕의 통치 아래에 있었으며, 그 권력의 중심지는 위트레흐트에 위치했다.
도레스타트는 북서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이곳은 과거 로마 요새가 있던 자리에 형성되었고, 오늘날의 베이크바이뒤르스테더(Wijk bij Duurstede) 인근, 라인강과 레크강이 갈라지는 지점에 위치한, 길이 약 3km에 달하는 대규모 상업 중심지였다.[27][28] 비록 내륙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도레스타트는 북해 교역망의 핵심 거점으로 기능했고, 주로 라인강 중부 지역에서 유입된 상품들을 취급했다.[28][29] 도레스타트에서 거래된 주요 상품 중 하나는 포도주였고, 이는 마인츠 남쪽 포도 재배지에서 생산되었다고 추정된다.[29] 또 이 도시는 주화 주조지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600년경에서 약 719년에 이르기까지 도레스타트는 프리슬란트인과 프랑크인 사이의 쟁탈 대상이 되어 계속해서 분쟁의 무대가 되었다.
프랑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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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에서 로마가 물러난 후, 프랑크인은 세력을 확장해 쾰른, 투르네, 르망, 캉브레 등지를 중심으로 한 소규모 프랑크 왕국들을 형성했다.[19][30] 개중 투르네의 왕들은 점점 다른 프랑크 왕들을 제압하며 우위를 확보했다. 5세기 말에 이르러 클로비스 1세는 뫼즈강 서쪽의 모든 프랑크 영토, 즉 오늘날의 네덜란드 남부를 포함한 지역을 정복했으며, 이후 갈리아 전역으로 정복 활동을 확대해 나갔다.
511년 클로비스 1세 사망 후 네 아들들은 왕국을 분할했고, 개중 테우데리크 1세는 이후 아우스트라시아가 되는 영토, 즉 오늘날 네덜란드 남부를 포함한 지역을 상속받았다. 테우데리크의 후계자들은 555년까지 아우스트라시아를 통치했고, 이 해에 클로타르 1세가 다른 프랑크 왕국을 통합해 프랑크 전 영역을 다시 하나로 만들었다. 하지만 클로타르 1세는 사후 다시 왕국을 네 아들에게 분할했고, 567년 카리베르트 1세의 사망 이후 프랑크 왕국은 3개의 영역으로 재편되었다. 이때 네덜란드 남부는 아우스트라시아의 일부로 남게 되었고, 이후 카롤링거 왕조가 부상할 때까지 계속해서 아우스트라시아의 북부에 해당했다.
프랑크인들은 갈리아 남쪽으로 확장하며 그곳에 정착했고, 결국 현지 주민들이 사용하던 속라틴어를 받아들이게 되었다.[12] 하지만 아우스트라시아 서부와 네우스트리아 지역에서는 9세기 중반까지도 공적 영역에서 게르만계 언어가 제2언어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언어는 10세기에 이르러 완전히 소멸했다.[31] 많은 프랑크인은 확장 과정에서 북부, 즉 오늘날의 네덜란드 남부와 플랑드르, 프랑스 북부 일부 지역에 계속 거주했다. 이로 인해 북부에 남은 프랑크인과 남쪽의 통치 엘리트 사이에 점차 문화적 분화가 심화되었다.[30] 살리족 프랑크인은 본래의 거주지와 그 인접 지역에 계속 머물며, 고대 프랑크어를 사용했는데, 이 언어는 9세기에 이르러 고대 네덜란드어로 발전했다.[12]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어-프랑스어 언어 경계가 형성되었는데, 당시에는 오늘날보다 더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12][30] 뫼즈강과 라인강 유역에서는 프랑크인이 정치적, 상업적 중심지를 형성했으며, 특히 네이메헌과 마스트리히트가 중요한 거점이었다.[30] 이들 프랑크인은 도레스타트와 위트레흐트 등지를 통해 북쪽의 프리슬란트인과 지속적으로 교류했다.
고고학적 구분에 대한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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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는 네덜란드 역사가들이 프랑크인, 프리슬란트인, 작센인이 저지대 지역을 각각 분담해 살았다는 견해를 일반적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20세기에 들어 점차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18] 문헌 자료가 대단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이 시기에 대한 이해는 상당 부분 고고학 자료의 해석에 의존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제시되어 온 '북부와 해안의 프리슬란트인, 남부의 프랑크인, 동부의 작센인'이라는 명확한 구분은 역사적으로 문제점이 많다는 것이 밝혀졌다.[32][33][34] 고고학적 증거는 지역에 따라 매우 상이한 양상을 보여주며, 어떤 지역에서는 주민의 연속성이 확인되는 반면, 다른 지역, 특히 프리슬란트와 홀란트의 해안 지역에서는 인구 감소와 함께 집단 교체가 일어났을 가능성을 시사한다.[35]
네덜란드어의 형성
[편집]고대 네덜란드어가 어디서 기원했는지는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살리족 프랑크인이 사용하던 언어였으리라 여겨진다. 프랑크인은 전통적으로 베저-라인 게르만어군에 속하는 집단으로 분류되나, 네덜란드어는 잉그바이오니아어군의 여러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36] 일부 현대 언어학자들은 이를 잉그바이오니아계 언어로 분류하기도 한다. 또 네덜란드어는 고대 작센어와도 다수의 공통점을 공유한다. 고대 네덜란드어는 고대 영어 및 고대 프리슬란트어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며, 이들 언어는 서로 상당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크인이 사용하던 언어로 기록된 문헌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고대 네덜란드어로 쓰인 자료 역시 매우 단편적이라, 그 발달과정을 상세히 재구성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고대 네덜란드어는 대략 1150년경에 이르러 중세 네덜란드어로 이행했다고 여겨진다.[12]
기독교화
[편집]로마인과 함께 네덜란드 지역에 전래된 기독교는, 적어도 마스트리히트에서는 서기 411년경 로마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30]
프랑크인은 국왕 클로비스 1세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후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이 사건은 일반적으로 496년으로 여겨진다. 북부 지역에서는 프리슬란트가 프랑크 왕국에 의해 정복된 이후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한편 동부의 작센인들은 작센 정복 이전에 이미 개종했고, 이후 프랑크인의 동맹이 되었다.
히베르노-스코틀랜드계 및 앵글로색슨계 선교사들, 특히 빌리브로드, 불프람(Wulfram), 보니파티우스는 8세기까지 프랑크인과 프리슬란트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보니파티우스는 754년 도쿰(Dokkum)에서 프리슬란트인에 의해 순교했다.
프랑크인의 지배와 신성로마제국에의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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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 초에 이르러 프리슬란트인은 남쪽의 프랑크인과 점차 빈번히 충돌을 겪게 되었고, 일련의 전쟁을 통해 프랑크 왕국이 결국 프리슬란트를 정복하게 되었다. 734년 보언(Boarn) 전투에서 네덜란드 지역의 프리슬란트인들은 프랑크군에게 패배했고, 이로써 라우베르스강(Lauwers) 서쪽 지역이 프랑크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이어서 785년,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가 비두킨트(Widukind)를 격파함으로써 라우베르스강 동쪽 지역 역시 프랑크의 통제 아래 들어갔다.
프랑크인의 언어적인 후예인 현대 네덜란드어 화자들, 지금의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지역의 주민들은 9세기 무렵부터 '프랑크인'이라는 칭호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이르러 프랑크인의 정체성은 민족적 정체성에서 벗어나 점차 정치적, 국가적 정체성으로 바뀌었으며, 그 범위는 오늘날의 프랑켄 지방과 주로 프랑스의 일드프랑스 지역으로 한정되었다.[37]
비록 사람들은 더 이상 스스로를 '프랑크인'이라 부르지 않게 되었지만, 네덜란드는 여전히 카롤루스 대제의 프랑크 제국 내 일부였다. 실제로 카롤링거 왕조가 라인강과 뫼즈강 사이 지역에서 기원했기 때문에, 아헨, 마스트리흐트, 리에주, 네이메헌과 같은 도시들은 카롤링거 문화의 핵심 중심지였다.[30] 카롤루스 대제는 네이메헌에 자신의 팔라티움(palatium)[38]을 최소 네 번 이상 두고 머물었다고 전해진다.
카롤링거 제국은 결국 프랑스, 독일, 북이탈리아를 포함한 서유럽 대부분을 포괄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843년 베르됭 조약을 통해 프랑크 제국은 세 부분으로 분할되었고, 서쪽에는 서프랑크 왕국, 동쪽에는 동프랑크 왕국, 사이에 중프랑크 왕국이 성립했다. 오늘날 네덜란드 지역의 대부분은 중프랑크 왕국에 속했고, 플랑드르는 서프랑크 왕국에 편입되었다. 이 분할은 이후 플랑드르와 다른 네덜란드어 지역 사이의 역사적, 정치적 분리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중프랑크 왕국(Francia Media)은 고유한 역사적, 민족적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한 채 일시적으로만 존재했던 프랑크 왕국이었다. 이 국가는 843년 베르됭 조약을 통해 루도비쿠스 피우스의 아들 사이에서 카롤링거 제국이 분할되며 성립되었다. 중프랑크 왕국은 동프랑크와 서프랑크 사이에 위치했고, 라인강과 스헬더강 사이의 프랑크 영토, 북해연안의 프리슬란트 지역, 부르군트 왕국의 옛 영토(후일 부르고뉴라 알려지는 서부 지역은 제외), 프로방스, 이탈리아 왕국을 포함했다.
중프랑크 왕국은 경건왕 루트비히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로타르 1세에게 귀속되었다. 이는 동생인 독일왕 루트비히와 대머리왕 샤를과 간헐적으로 내전을 벌인 끝에 확보한 결과였다. 황제의 칭호를 지닌 로타르 1세의 통치 아래에서 중프랑크 왕국에는 카롤루스 대제의 거처였던 아헨과 로마가 포함되었다. 855년, 로타르 1세는 프륌 수도원에서 임종을 맞으며 자신의 영토를 다시 아들들에게 분할했다. 이로써 알프스 이북의 영토 대부분, 즉 오늘날의 네덜란드 지역은 로타르 2세에게 귀속되었고, 이 영토는 후일 로타링기아라고 불리게 되었다. 869년 로타르 2세가 사망하자, 로타링기아는 숙부들인 동프랑크 국왕 루트비히와 서프랑크 국왕 샤를에 의해 메르센 조약(870)을 통해 분할되었다. 비록 이 시기 네덜란드 일부 지역이 바이킹의 지배를 받기도 했지만, 870년 이후 형식적으로는 동프랑크 왕국의 일부가 되었고, 훗날 962년에 성립되는 신성로마제국으로 이어지게 된다.
바이킹의 공격
[편집]9세기와 10세기에 바이킹은 저지대 지역의 해안과 하천 연안에 위치한 프리슬란트 및 프랑크계 도시들을 반복적으로 약탈했다. 이들 지역은 방어력이 취약했기 때문에 바이킹의 공격에 특히 노출되어 있었다. 비록 바이킹이 이 지역에 대규모로 정착하지는 못했으나, 일부 지역에는 장기간 거점을 구축하거나 심지어 지배자로 인정받은 사례도 있었다. 네덜란드 및 프리슬란트의 역사연구에서는 도레스타트가 834년부터 863년 사이 바이킹 습격으로 인해 쇠퇴했다고 전통적으로 이해해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해당 지역에서 바이킹의 존재를 명확히 입증할 수 있는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기에, 이러한 해석에 대해서는 최근 회의적인 시각도 제기되고 있다.[39]
저지대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바이킹 가문 가운데 하나는 도레스타트의 로리크(Rorik) 가문으로, 비어링언(Wiereingen)을 근거지로 삼았다. 동생인 '젊은 하랄드(Harald the Younger)'는 발헤런(Walcheren)을 거점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모두 하랄드 클라크(Harald Klak)의 조카로 여겨진다.[40] 약 850년경 로타르 1세는 로리크를 프리슬란트 대부분의 지배자로 승인했고, 이후 870년에는 로리크가 네이메헌에서 대머리왕 샤를을 알현해 그의 봉신이 되었다. 이 시기에도 바이킹의 약탈은 계속되었다. 하랄드의 아들 로둘프는 873년 오스터르호(Oostergo) 주민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로리크는 882년 이전 어느 시점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저지대 지역에서는 주로 은으로 이뤄진 바이킹 보물 매장지가 발견되어 왔다. 이 유적 중 두 곳은 비어링언에서 출토되었다. 1996년에 발견된 대규모 보물 매장지는 85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며, 로리크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처럼 귀중한 보물이 매장되었다는 사실은 비어링언에 영구적인 정착지가 존재했음을 시사하는 중요한 근거로 여겨진다.[41]
879년경 고드프리트(Godfried)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프리슬란트 지역에 진입하여 저지대 전역을 공포에 빠뜨렸다. 그는 헨트를 거점으로 삼아 마스트리히트, 리에주, 스타블로(Stavelot), 프륌, 쾰른, 코블렌츠 등을 약탈했다. 882년부터 죽을 때까지 그는 프리슬란트 대부분을 지배했고, 때문에 '프리슬란트 공작 고드프리트'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지배권은 동프랑크 왕 카를 3세(뚱뚱한 카를)에 의해 공식적으로 승인되었고, 때문에 카롤링거 왕실의 봉신이 되었다. 하지만 885년 고드프리트는 암살당했고, 이후 홀란트의 게롤프(Gerolf)가 뒤를 이어 지배권을 장악하며 프리슬란트에 대한 바이킹의 통치는 종식되었다.
저지대 지역에 대한 바이킹의 약탈은 1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880년부터 890년 사이의 바이킹 약탈 흔적은 쥣펀과 데벤터르에서 확인되고 있다. 920년에는 독일의 국왕 하인리히 1세가 위트레흐트를 해방시켰다. 여러 연대기 기록에 따르면, 마지막 바이킹 공격은 11세기 초에 발생했고, 그 대상은 틸(Tiel) 혹은 위트레흐트였던 것으로 전해진다.[42]
이러한 바이킹의 공격은 네덜란드 지역을 포함한 중프랑크 왕국을 둘러싸고 프랑스계와 독일계 영주들이 패권을 다투던 시기와 맞물려 벌어졌다. 그 결과 이 지역에 대한 중앙권력의 통제는 약화되어 있었고, 바이킹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저항이 있었다고 해도 주로 지역 귀족들이 수행했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 군사적 위상을 강화하게 되었다.
중세 성기 및 후기 (1000 ~ 1433)
[편집]신성로마제국의 일부
[편집]10~11세기, 네덜란드 지역은 로타링기아의 공작들과 위트레흐트 및 리에주 주교들의 협력을 받던 독일 국왕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독일은 오토 대제가 황제로 즉위한 이후 신성로마제국이라 불리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도시 네이메헌은 당시 독일 황제들의 중요한 거점 중 하나였으며, 여러 황제들이 이곳에서 태어나거나 사망했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후 테오파누(Theophanu)도 여기에 포함된다. 한편 위트레흐트 역시 중요한 도시이자 상업 중심지로 기능했다.
정치적 분열
[편집]신성로마제국은 정치적 통일을 유지하는 데 실패했다. 도시들의 자치권이 점차 강력해지는 한편, 각지의 영주들은 자신들의 백작령이나 공작령을 사실상 독립된 영지처럼 통치했다. 명목상 제국의 군주였던 황제에 대해서는 제대로 복종하려 들지 않았다. 따라서 오늘날 네덜란드에 해당하는 지역의 상당 부분은 홀란트 백작, 헬러 공작, 브라반트 공작, 위트레흐트 주교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한편 북부의 프리슬란트와 흐로닝언 지역은 비교적 독립성을 유지하며 하급 귀족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여러 봉건 국가들은 거의 끝없는 전쟁 상태에 놓여 있었다. 헬러와 홀란트는 위트레흐트를 둘러싸고 서로 경쟁했고, 한때 오늘날 네덜란드 영토의 절반가량을 지배하던 위트레흐트는 주교 선출을 둘러싼 지속적인 혼란으로 인해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한편 인접 지역의 세습 왕조들은 비교적 안정된 통치를 유지했다. 그 결과 흐로닝언, 드렌터, 본래 위트레흐트에 속해 있던 헬러의 상당 부분은 독립적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브라반트는 주변 지역을 정복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홀란트 역시 제일란트와 프리슬란트를 장악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프리슬란트인
[편집]오늘날 홀란트 지역에 해당하는 곳에 거주하던 주민들의 언어와 문화는 본래 프리슬란트계였다. 이 지역은 인구 밀도가 낮았으며, '서프리슬란트'라고 불렸다. 전통적으로는 플랑드르나 위트레흐트, 혹은 그 양쪽에서 이주한 프랑크인이 홀란트 지역의 프리슬란트인을 대체했다는 견해가 제기되어 왔으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고고학적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최근의 연구는 라인강 하구 지역의 프리슬란트인이 프랑크계 언어, 봉건제, 기독교를 수용하며 점차 변화했고,[43][44][45] 이러한 변화된 정체성이 수 세기에 걸쳐 북쪽으로 확산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로써 형성된 새로운 '홀란트' 정체성이 오늘날의 네덜란드 북부 지역에 확산되었으며, 알크마르 북쪽 지역은 여전히 예전처럼 '서프리슬란트'라고 불리고 있다.
북부의 나머지 프리슬란트 지역은 이 시기에도 독립성을 유지했다. 이 지역에는 이른바 '프리슬란트의 자유'라고 불리는 고유한 제도들이 존재했으며, 다른 유럽 지역에서 일반화된 봉건제나 도시 귀족 지배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프리슬란트인은 스스로를 스위스인과 유사한 존재로 인식했고, 그들의 전투 구호는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죽겠다"였다. 하지만 이러한 자치는 1498년 알브레흐트 폰 작센-마이센이 이끄는 독일 용병대(란츠크네흐트)에 패배하면서 종식되었다. 이로써 프리슬란트는 독립을 상실하고 외부 세력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홀란트의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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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독립 영주 중 홀란트 백국이 권력의 중심을 차지했다. 이 지역은 본래 862년, 덴마크 출신의 족장 로리크가 황제에 대한 충성을 조건으로 봉토로서 하사받은 곳이었다. 당시 켄네메를란트(Kennemerland, 오늘날의 하를럼 일대)는 로리크의 후계 세력 중 점차 세력을 확대해 정치적, 경제적 중요성을 갖추게 되었다. 11세기 초에 이르러 홀란트 백작 디르크 3세는 뫼즈강 하구에서 통행세를 징수할 만큼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으며, 하로트링기아 공작의 군사적 개입에도 맞서 이를 저지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1083년, 오늘날의 남홀란트주와 북홀란트주 남부에 해당하는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홀란트'라는 이름이 처음 문헌에 등장한다. 이후 2세기에 걸쳐 홀란트의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홀란트 백작은 제일란트 대부분을 정복했고, 1289년에 이르러 비로소 플로리스 5세가 서프리슬란트, 즉 오늘날 북홀란트의 북부 지역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팽창과 성장
[편집]12세기 이후 저지대의 습지에서 배수 및 치수 사업이 본격적으로 확대되었다. 이전까지 주요 도시는 위트레흐트, 캄펜, 데벤터르, 즈볼러, 네이메헌, 쥣펀 등과 같이 주요 하천 북쪽에 형성되어 있었으나, 제방 축조와 배수 체계 확립을 통해 경작 가능한 토지가 새로이 조성되며 인구가 증가했다. 이 과정에서 홀란트는 다른 지역에 비해 점차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13세기 이후 북부 지역에서는 수리 관리가 필수적인 과제가 되었으며, 이는 자연환경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역 간 협력 및 제도적 조직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수리조합(heemraadschappen)이 설립되었고, 이들을 총괄하는 '보루 백작'은 수자원 관리뿐만 아니라 재정, 치안, 사법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권한을 행사했다. 이러한 제도적 발전을 바탕으로 13세기 말에 이르러 홀란트는 북부 지역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46]
저지대 남부 지역은 인구가 조밀하고 경제적으로도 고도로 발달해 있었으며, 당시 유럽에서 가장 도시화된 지역 중 하나였다. 그러나 저지대를 가로지르는 주요 하천들이 동서 방향으로 흐르면서 군사적, 정치적 경계 역할을 했고, 이로 인해 남부 지역은 북부에 대해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구조적 요건 속에서 홀란트 백작은 북부 지역에서 정치적인 중요성을 점차 확대해 나갔으며, 홀란트는 결국 제일란트에 대한 지배권도 확립하게 되었다.[47]
길드가 조직되고 시장이 형성되면서 생산이 지역 내 수요를 넘어서는 수준에 이르렀다. 또 화폐 도입은 과거보다 훨씬 원활한 상업 활동을 가능케 했다. 기존의 도시는 더욱 성장했고, 수도원이나 성을 중심으로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었으며, 이들 도시에서는 상업에 종사하는 중산층이 점차 등장했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상업 활동과 도시 발전 역시 가속화되었다.
십자군은 저지대 지역에서도 큰 호응을 얻었고, 많은 이들이 성지로 원정을 떠났다. 한편 국내에서는 비교적 평화로운 상황이 유지되었다. 바이킹의 약탈은 이미 종식되었고, 이러한 안정된 환경은 무역 활성화와 상업의 성장에 기여했다.
도시들은 성장하며 번영했고, 특히 플랑드르와 브라반트 지역이 그러했다. 도시들이 부와 영향력을 축적하면서 군주로부터 특권을 매입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자치권, 행정권, 입법권 등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일부 부유한 도시는 사실상 독립적인 공화국과 같은 성격을 띠게되었다. 개중에서도 브뤼허와 안트베르펜은 특히 중요한 도시로 성장했고, 이후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상업항구 도시 중 하나로 발전하게 되었다.

훅파-대구파 전쟁은 1350년부터 1490년까지 홀란트 백국에서 벌어진 일련의 내전과 무력 충돌을 가리킨다. 이 전쟁의 직접적인 쟁점은 홀란트 백작의 계승 문제였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도시 상인 계층과 전통적 귀족 계급 사이의 권력 투쟁에서 비롯되었다고 평가된다.
대구파는 대체로 홀란트의 진보적인 도시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훅파는 주로 보수적인 귀족층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 장기간에 걸친 분쟁에는 홀란트와 에노의 백작이었던 빌럼 4세, 마르가리타, 빌럼 5세, 빌럼 6세를 비롯해 부르고뉴 공작 장 1세와 선량공 필리프 등 주요 인물들이 관여했다. 이 갈등을 대표하는 인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이는 에노 백작부인 야코바(자클린)다.
홀란트 백국이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에 의해 정복된 과정은 다소 이례적이었다. 당시 홀란트의 유력 귀족들은 선량공이 권리를 갖고 있지 않았음에도, 오히려 그에게 홀란트 정복을 요청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러한 현상의 배경으로, 홀란트 지배층이 플랑드르의 경제권에 편입되고, 그곳의 법제와 행정 체제를 도입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14~15세기 유럽 전역은 잦은 갈등으로 혼란을 겪었으나, 플랑드르는 상대적으로 안정과 번영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르고뉴와 합스부르크 시대 (1433 ~ 1567)
[편집]부르고뉴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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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네덜란드와 벨기에에 해당하는 지역 대부분은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1396~1467)에 의해 통합되었다.[48] 부르고뉴 통합 이전에 네덜란드인들은 자신을 특정 도시의 주민, 지역 공국이나 백작령의 구성원, 혹은 신성로마제국의 신민으로 인식했다. 이러한 여러 영지는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개인 통치 아래에 결합되어 있었다.
이 지역의 무역은 특히 해운과 운송 부문을 중심으로 급속히 발전했다. 새로운 지배자들은 네덜란드 상업의 이익을 적극적으로 보호했다. 암스테르담은 성장을 거듭해 15세기에 발트해 지역에서 생산된 곡물을 취급하는 유럽의 주요 항구로 부상했다. 암스테르담은 이 곡물을 벨기에, 프랑스 북부, 잉글랜드의 주요 도시에 공급했다. 이러한 무역은 지역 주민들에게 필수적이었는데, 토지 개간으로 인해 습지가 배수되면서 토양이 침하되어 더 이상 자체적으로 충분한 식량을 생산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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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5세(1500~1558)는 플랑드르의 도시 헨트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그는 투르네, 아르투아, 위트레흐트, 흐로닝언, 헬더를 병합함으로써 부르고뉴의 영토를 확장해 이른바 17개 주를 형성했다. 이 지역의 도시들은 이미 부르고뉴 시절의 조상들에 의해 통합되어 있었으나, 명목상으로는 프랑스 혹은 신성로마제국의 봉신령에 속해 있었다. 카를이 미성년이던 시기에는 숙모인 마르가리타가 섭정으로서 통치했다. 1528년에는 프랑스가 플랑드르에 대한 오랜 권리를 공식적으로 포기했다.[49]

1515년부터 1523년까지 카를의 네덜란드 통치는 프리슬란트 농민들의 반란에 직면했다. 이 반란은 피어르 헤를로프스 도니아(Pier Gerlofs Donia)와 베이아르트 옐케마(Wijard Jelckama)가 주도했다. 한편 헬러는 네덜란드 북동부와 독일 북서부에서 독립 국가를 건설하려는 시도를 이어갔다. 16세기 초 헬러는 재정이 부족해 병사들이 스스로 생계를 해결하도록 방치했고, 때문에 이들은 적대 지역을 약탈하며 생활했다. 이 병사들은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고, 실제로 헤이그를 약탈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부르고뉴 공작들은 혼인, 매입, 전쟁을 통해 점차 저지대 지역을 구성하던 17개 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이들 지역은 오늘날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남동부에 해당한다. 이 영토들은 이른바 '부르고뉴 권역'이라 불리게 되었고,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카를 5세는 1506년 통치권을 이어받았으나, 1515년 스페인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기 위해 저지대 지역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친족들을 섭정으로 임명해 통치를 맡겼으며, 실제 행정은 그 아래에서 활동한 스페인 관리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각 주는 고유한 정부 조직과 법원을 보유했고, 전통적으로 지역 귀족들이 이를 통제했다. 수 세기 동안 형성된 고유한 권리와 특권 역시 유지되고 있었다. 각 도시도 마찬가지로 고유한 법적 권위와 자치권을 가졌고, 대체로 상인 계층이 도시를 운영했다. 이에 더해 스페인은 중앙집권적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총의회를 설치하고 자체적인 관료 체계를 구축했다.[50] 하지만 카를의 명을 받은 스페인 관리들은 기존 관습과 지방 귀족, 도시 엘리트의 권한을 무시했고, 이는 반 스페인 정서를 고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 긴장은 결국 네덜란드 독립전쟁으로 이어졌다. 종교 개혁이 확산되던 시기, 황제였던 카를은 가톨릭 신앙을 수호하고 개신교를 탄압하려 했다. 특히 남부의 대도시 안트베르펜을 중심으로 불안이 증폭되었다. 한편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오랜 전쟁이 끝나면서, 스페인은 군사력을 재정비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네덜란드에 대한 통제 강화로 이어졌다.[51]
1548년 카를 5세는 네덜란드를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독자적인 법적 지위를 지닌 단위로 인정했다. 이에 따라 제국의 일반 법률 가운데 상당수가 더 이상 이 지역에 적용되지 않게 되었다. 이른바 "아우크스부르크 협정"[52]을 통해 네덜란드와 프랑슈콩테는 신성로마제국 내 '부르고뉴 관구'로 편성되었다. 이듬해인 1549년에는 "국사조칙"이 제정되어, 17개 주는 앞으로도 분할되지 않고 하나의 통합된 단위로서 카를의 후계자들에게 상속되어야 한다고 규정되었다.[53]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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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종교개혁은 북유럽 전역에서 빠르게 확산되었으며, 특히 루터파와 칼뱅파라는 형태로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54] 네덜란드에서는 초기에 개신교 신자들이 탄압을 받았으나, 점차 지방 당국의 묵인 아래 활동하게 되었다. 1560년대에 이르러 개신교 공동체는 비록 소수였지만 네덜란드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55] 상업에 기반하고 있던 네덜란드 사회에서는 종교적 관용과 자유가 필수적인 가치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가톨릭 군주였던 카를 5세와 그 뒤를 이은 펠리페 2세는 개신교를 가톨릭 교리에 대한 이단이자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간주하고 이를 근절하고자 했다. 반대로 엄격한 도덕성과 금욕 생활을 중시한 네덜란드 개신교도들은 자신들의 성서 중심 신앙과 절제된 삶이 성직 귀족층의 사치와 형식적 신앙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믿었다.[56] 군주들의 강력한 탄압 정책은 네덜란드 사회 전반에 불만을 증폭시켰으며, 지방 정부들이 비교적 관용적인 정책을 유지하려 했던 것과 대조를 이루었다.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러한 긴장은 폭발적인 국면에 접어들었고, 펠리페 2세는 반란을 진압하고 네덜란드를 다시 가톨릭으로 되돌리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57]
종교개혁의 첫 번째 물결에서 루터파는 안트베르펜을 비롯한 남부 지역의 엘리트층 사이에서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스페인은 이를 성공적으로 탄압했고, 그 결과 루터파는 동프리슬란트 지역에서만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58]
종교개혁의 두 번째 물결은 재세례파였다. 이는 홀란트와 프리슬란트 지역의 평민 사이에서 특히 큰 호응을 얻었다. 재세례파는 사회적으로 매우 급진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종말이 임박했다고 믿었다. 이들은 기존의 사회 질서와 생활 방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공동체적 삶을 실천하고자 했다. 그 결과는 상당한 사회적 혼란이었다. 네덜란드 출신의 저명한 재세례파 인물로는 메노 시몬스가 있다. 그는 이후 메노파 교회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 운동은 북부 지역에서 일정 부분 허용되었으나, 대규모로 확산되지는 못했다.[59]
종교개혁의 세 번째 물결이면서 가장 지속적으로 영향을 남긴 흐름은 칼뱅파였다. 칼뱅파는 1540년대에 네덜란드에 유입되어, 특히 플랑드르 지역을 중심으로 엘리트 계층과 일반 민중 모두로부터 지지를 얻었다. 이에 대해 가톨릭 스페인 정부는 강경한 탄압으로 대응했고, 네덜란드 종교재판소를 설치해 개신교를 억압했다. 이에 반발해 칼뱅파는 저항에 나섰으며, 1566년에는 성상파괴운동이 발생했다. 이는 교회 내 성상과 가톨릭 성물들을 조직적으로 파괴한 사건이었다. 같은 해, 칼뱅파였던 침묵공 빌럼은 종교를 불문하고 모든 네덜란드인을 해방시키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고, 곧 80년 전쟁으로 이어졌다. 블륌은 "그의 인내심, 관용, 결단력, 신민에 대한 배려, 그리고 합의에 기반한 통치에 대한 신념이 네덜란드인들을 결속시키고 저항 정신을 유지하게 했다."라고 평가했다.[60] 1572년에 이르러 홀란트와 제일란트는 대부분 칼뱅파의 지배 아래 들어갔고, 다른 지역들은 여전히 대체로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다.[61][62]
전쟁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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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는 특히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 이후 스페인 제국에 있어 매우 중요한 조약이 되었다. 이 조약으로 1521년부터 1559년까지 이어진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 전쟁이 종결된 것이다.[51] 카토-캉브레지 조약은 이탈리아를 전쟁터로 만들었던 오랜 전쟁의 마무리라는 점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북유럽의 정치 질서에도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스페인은 프랑스를 남북에서 압박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고, 그 결과 네덜란드는 스페인 제국의 전략적 요충지로서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프랑스와 스페인의 주요 분쟁이 해결되자, 스페인은 더 이상 네덜란드에 대규모 병력을 주둔시킬 필요가 없어졌다. 그 결과 네덜란드인들은 평시 경제 활동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 네덜란드에서는 상품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했으며, 특히 어업이 오랫동안 핵심 산업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청어잡이가 특히 번성해, 네덜란드 항구에서 출항한 선박만 해도 약 2천 척에 달했다. 당시 스페인은 여전히 네덜란드 상인의 최대 고객이었고, 플랑드르 상인으로부터 가구와 생활용품을 실은 대형선 50척 분량을 구매했다. 또 네덜란드산 모직물은 유럽 전역에서 높은 수요를 보였다. 네덜란드는 스페인산 양모를 대량으로 수입해 가공했고, 이를 통해 약 400만 플로린 상당의 모직물을 판매했다. 이 시기 네덜란드는 잉글랜드산 양모 역시 대량으로 수입했는데, 그 규모는 스페인산과 거의 맞먹었다. 잉글랜드와의 무역 규모만 해도 총 2천 4백만 플로린에 이르렀으며, 그중 상당 부분은 네덜란드에서 생산된 상품을 수출한 것이었다. 이처럼 16세기 중반 네덜란드는 본격적으로 '황금시대'에 진입하고 있었다. 브라반트와 플랑드르는 당시 네덜란드에서 가장 부유하고 번영하는 지역이었으며,[63]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1560년경 네덜란드의 인구는 약 300만 명에 달했고, 인구 1만 명 이상의 도시가 25곳이나 존재해 유럽에서 가장 높은 도시 집중도를 보였다. 특히 안트베르펜은 인구 약 10만 명에 달하는 국제적 금융, 상업 중심지였다. 이러한 번영은 스페인으로 하여금 네덜란드를 결코 포기할 수 없게 만들었으며, 결국 80년 전쟁으로 이어졌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펠리페 2세는 저지대 지역에서 종교개혁이 확산되며 칼뱅파 신자들이 증가하는 상황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개신교도들에 대한 박해를 강화하고, 행정, 사법, 재정 전반에 걸쳐 중앙집권화를 추진했다. 이러한 정책은 현지 사회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반란으로 이어졌다. 이에 펠리페 2세는 1567년 스페인군을 이끌고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 즉 알바 공작을 파견해 네덜란드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64]
알바 공작이 네덜란드에 진군할 당시 그에게 맞서 저항한 세력은 에흐몬트 백작 라모랄(Lamoral)과 호른 백작 필리프 드 몽모랑시(Philippe de Montmorency) 등 일부 귀족뿐이었다. 알바 공작과 스페인군이 접근하자, 오라녜 대공 빌럼은 1567년 4월 11일 자신의 세 형제 및 가족과 함께 독일로 피신했다. 알바 공작은 이들 귀족과 회담을 갖고자 한다는 명분으로 브뤼셀로 그들을 불러들였으나, 도착하자마 모조리 체포했다. 결국 에흐몬트 백작과 호른 백작은 처형되었다.[64] 이후 알바 공작은 마르가리타 파르마 공작부인이 이전에 개신교도와 체결했던 모든 합의를 무효화했고,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을 집행하기 위해 종교재판소를 설치해 강경한 탄압 정책을 시행했다.
80년 전쟁 (1568 ~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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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독립전쟁은 일반적으로 '80년 전쟁'이라 불린다. 이 전쟁의 전반부 약 50년(1568~1618)은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네덜란드 개신교 반란 세력 사이의 전쟁으로, 종교적 성격이 강한 무력 충돌이었다. 이후 마지막 30년(1618~1648) 동안 이 분쟁은 유럽 전역을 휩쓴 30년 전쟁의 일부가 되었다.[65] 네덜란드의 7개 반란 주는 1579년 위트레흐트 동맹을 통해 결속했고, 이를 바탕으로 네덜란드 연합주를 형성했다. 이어 1581년 7월 26일에는 독립선언서를 공포해 스페인 국왕에 대한 충성을 공식적으로 철회했다. 종교적 관용은 이 새로운 공화국의 핵심 이념 중 하나였으며, 개신교 정치 질서의 중요한 기초를 이루었다.
오라녜 공 빌럼(1533~1584)은 네덜란드 독립전쟁 초기 단계에서 반란 세력을 이끌던 지도자였다. 전쟁 초기에는 스페인군이 우세를 점했으나, 이후 네덜란드 측은 점차 반격에 나섰다. 1572년 11월과 12월에는 쥣펀과 나르덴(Naarden)의 주민들이 스페인군에 의해 집단학살 당했다. 같은 해 12월 11일부터 하를렘은 포위 공격을 받아 약 7개월 동안 저항하다가 1573년 7월 13일 함락되었다. 이어서 1575년 8월 7일에는 아우데바터(Oudewater)가 스페인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주민 대부분이 살해되었다. 마스트리흐트는 1576년과 1579년 두 차례에 걸쳐 포위와 약탈을 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전쟁은 대규모 회전보다는 주로 공성전의 형태로 전개되었고, 이 과정에서 총독 알렉산드로 파르네세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의 전략은 도시들을 무력으로 완전히 파괴하기보다는, 항복할 경우 관대한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약탈과 학살을 금지하고, 기존의 도시 특권을 보장하며, 전면적 보복 없이 사면을 약속하고, 가톨릭으로의 복귀도 점진적으로 이뤄지도록 했다. 이 정책 덕분에 남부와 동부 지역의 보수적 가톨릭 세력은 스페인 편에 섰고, 파르네세는 안트베르펜을 비롯해 오늘날 벨기에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지역을 다시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66] 한편 네덜란드어 사용 지역 가운데 대부분은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플랑드르는 끝내 스페인령으로 남게 되었다. 플랑드르는 반스페인 성향이 가장 강한 지역이었고, 그 결과 대규모 인구 이동이 발생했다. 안트베르펜 인구의 절반, 브뤼헤와 헨트 인구의 약 75%, 니우포르트와 주변 농촌 지역 주민 대부분이 북쪽으로 이주했다.[67] 파르네세의 군사적 성공은 저지대 남부를 가톨릭 진영의 통제 아래 두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가톨릭 반종교개혁의 중요한 성과로 평가된다.
전쟁은 그 이후로도 반세기 동안 계속되었으나, 주요한 군사적 충돌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1648년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은 네덜란드 연합주의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네덜란드인들은 15세기부터 점차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했으나, 법적으로는 1648년까지 여전히 신성로마제국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이 시기 사람들의 정체성은 주로 자신이 속한 지방에 기반하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홀란트가 단연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되었다.
네덜란드의 가톨릭교도들은 한때 칼뱅파에 의해 탄압받는 불법적인 소수 집단이었다. 하지만 1572년 이후 눈에 띄는 반전이 이뤄졌는데, 가톨릭 반종교개혁의 일환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가톨릭 측은 신학교를 설립하고 교회 제도를 재정비했으며, 개신교 지역으로 선교사를 파견했다. 이 과정에서 평신도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반면 칼뱅파 정부는 영향력이 커 보이는 가톨릭 사제들을 종종 체포하거나 탄압했다. 그럼에도 가톨릭 인구는 약 3분의 1 수준에서 유지되었으며, 특히 남동부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기반을 유지했다.[68][69]
황금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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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황금시대는 대략 1588년 네덜란드 공화국이 성립한 시점부터 1672년 재난의 해(Rampjaar)까지 이어진 시기를 가리킨다. 이 시기 동안 네덜란드는 무역, 과학, 예술, 그리고 해외 식민 활동에서 유럽 내에서 가장 두드러진 발전을 이루었다. 전반기는 80년 전쟁의 발발부터 1648년 전쟁 종결까지에 해당하며, 후반기는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이 시작될 때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 동안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를 중심으로 아메리카, 남아프리카, 아시아 각지에 상관과 식민지를 건설했고, 강력한 네덜란드 해군의 보호 아래 세계적인 상업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네덜란드는 대서양 삼각무역과 노예무역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네덜란드 문화는 이 시기 르네상스를 맞이했다. 하지만 17세기 말에 이르러 주변 강대국과의 갈등, 그리고 경제적 영향력 쇠퇴로 인해 국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이 시기 네덜란드가 세계적인 해양, 상업 강국으로 부상한 과정을, 역사학자 K.W. 스바르트(Swart)는 "네덜란드의 기적"이라 명명했다.[70] 한편, '네덜란드 황금시대'라는 용어는 당시 네덜란드가 노예무역과 식민 지배에 깊이 관여했다는 점 때문에 21세기에 들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암스테르담 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네덜란드의 문화 기관들은 이 용어의 사용을 지양하거나 재고하고 있다.[71][72]
네덜란드 제국
[편집]아메리카의 네덜란드
[편집]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네덜란드 상인들로 구성된 특허장 회사였다. 1621년 6월 2일, 네덜란드 연합주로부터 서인도, 즉 카리브해 지역에 대한 무역 독점권을 부여받았고, 동시에 아프리카 노예무역, 브라질, 카리브해, 북아메리카에 대한 관할권을 부여받았다. 이 회사의 활동 범위는 서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 태평양 군도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었다. 서인도회사는 아메리카 대륙 내 네덜란드의 식민지 건설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가이아나와 아마존강 유역에 세워진 최초의 요새와 정착지는 159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만 네덜란드인이 실제로 이주해 정착하는 형태의 식민화는 잉글랜드나 프랑스처럼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그 결과 17세기 말까지 많은 네덜란드 정착지가 상실되거나 포기되었지만, 수리남과 네덜란드령 카리브해 군도에 대한 지배권은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북아메리카 식민지는 비버 가죽 무역을 위한 개인 사업의 일환이었다. 니우네덜란드는 초기 수십 년 동안 아주 더디게 정착이 진행되었는데,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의 운영 실패와 선주민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1650년대에 들어 이 식민지는 급격히 성장했고, 대서양 세계에서 중요한 무역 항구로 부상했으며, 매우 다양한 민족 구성을 지녔다. 1664년 포트 암스테르담이 잉글랜드에 항복한 사건은 1667년에 공식 인정되었고, 제2차 영란전쟁에 영향을 끼쳤다. 1673년 네덜란드는 해당 지역을 다시 탈환했으나, 제3차 영란전쟁을 끝낸 1674년 4월 5일의 웨스트민스터 조약에 따라 이곳을 다시 양도했다.[73]
초기 정착민의 후손은 미국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루스벨트 가문과 밴더빌트 가문이 대표적인 사례다. 허드슨 밸리 지역은 오늘날까지도 네덜란드적 유산을 강하게 간직하고 있다. 이 식민지에서 도입한 시민권과 다원주의는 이후 미국의 정치, 사회 생활에서 핵심적인 원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74]
노예 무역
[편집]노예제는 네덜란드 본국 내에서는 불법이었지만, 제국 전반에서는 번성했고 경제를 지탱하는 데 기여했다.[75] 1619년 네덜란드는 아프리카와 버지니아 사이의 대규모 노예무역을 구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1650년경에는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노예무역 국가가 되었다. 이 지위는 약 1700년경 영국에 의해 추월당했다. 역사가들은 네덜란드가 대서양을 건너 총 약 55만 명의 아프리카 노예를 수송했으며, 개중 약 7만 5천 명이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 선상에서 사망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한다. 1596년부터 1829년까지 네덜란드 상인들은 네덜란드령 기아나에서 25만 명, 네덜란드령 카리브 제도에서 14만 2천 명, 네덜란드령 브라질에서 2만 8천 명의 노예를 판매했다.[76] 이와 더불어, 주로 인도 출신이며 일부는 아프리카 출신인 수만 명의 노예가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이송되었고,[77] 동인도 출신 노예 역시 아프리카와 서인도로 수송되었다.
아시아의 네덜란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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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는 1602년 정부로부터 아시아, 특히 무굴제국 치하 인도와의 무역 독점권을 부여받으며 등장했다. 이 회사는 여러 면에서 세계 최초의 사례들을 만들어냈는데, 최초의 다국적 기업이었고, 최초로 주식을 발행한 회사였으며, 전쟁을 수행하고, 조약을 체결하며, 화폐를 주조하고, 식민 정착지를 건설할 수 있는 준정부적 권한을 보유한 최초의 거대 기업이었다.[78]
1602년부터 1796년까지 VOC는 4,785척의 선박으로 거의 100만 명에 달하는 유럽인을 아시아 무역에 종사시키려 파견했다. 그 결과 아시아산 무역품 250만 톤 이상이 본국에 들어왔다. VOC는 17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향신료 독점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누렸다. VOC의 활동 중심지는 주로 오늘날 인도네시아에 해당하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였으며, 그 거점은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였다. 바타비아는 중요한 상업 중심지로 기능했고, 거의 200년 동안 연 18%의 배당금을 지급했다. VOC는 또 1624~1662년과 1664~1667년 중 타이완 일부를 식민지로 삼았으며, 일본에서는 데지마에 설치된 유일한 서양 무역 거점을 운영했다.
원산업화 시기 동안, 네덜란드는 직물 수입의 약 50%, 비단 수입의 약 80%를 무굴제국으로부터 공급받았고, 대부분은 무굴제국에서 가장 발전한 지역으로 알려진 벵골 수바에서 생산된 것이었다.[79][80][81][82]
17세기에 이르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실론(오늘날의 스리랑카) 일부 지역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네덜란드가 점령한 말라바르 지역에 항구를 설치하면서, 인도 내에서 네덜란드의 정착지와 상관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트라반코르-네덜란드 전쟁 중 트라방코르 왕국과의 콜라첼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네덜란드의 인도 진출은 중단되었다. 이 패배 이후 네덜란드는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고, 더 이상 인도에서 주요한 세력으로 간주되지 않게 되었다.[83][84]
결국 18세기에 들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부패로 인해 심각한 부담을 안게 되었고, 마침내 1800년 파산했다. 그 자산과 영토는 정부에 의해 인수되어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바뀌었다.
근대
[편집]현대
[편집]제1차 세계 대전에서 네덜란드는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도중인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은 네덜란드를 침입, 5월 14일에 항복을 받아냈다. 여왕 빌헬미나와 정부 각료들은 영국으로 탈출 후 런던에 망명정부를 차렸다. 이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레지스탕스를 지원하고 해외 영토를 관리하면서 대독 항전을 전개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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